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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갤로퍼와 아버지

음주 편

by 봉봉주세용

어릴 때부터 일요일에는 아버지와 사우나에 갔다. 군대 전역을 한지 얼마 안 된 어느 일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사우나에 갔다가 해장국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 운전 얘기가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 장롱 면허였는데 이제는 운전 연습을 해야겠다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운전 연습을 하려고 하면 중고차를 사서 몰아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중고차를 살 수 있는 돈을 모아뒀다고 얘기했더니 아버지는 말 나온 김에 차를 사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밥을 먹고 바로 중고차를 사러 갔다. 제주는 바다로 둘러 쌓여 있어 해풍이 분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 있는 차는 상대적으로 금방 부식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육지에서 중고차를 사서 갖고 오기로 했다.


중고차는 서울에서 사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차를 사면 완도까지 차를 몰고 가서 배에 싣고 와야 한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피곤할 것 같았다. 그래서 광주에서 차를 보기로 했다.


광주는 아버지 고향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어릴 적 살던 동네를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광주에서 제일 큰 중고차 시장으로 갔다. 가기 전 중고차 사이트에서 괜찮은 차량을 몇 개 찍어 두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실물이 없었다. 전화로 확인하고 간 것인데 잠깐 사이에 팔렸다고 했다. 대신 더 괜찮은 중고차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우리에게 차를 보여준 딜러는 시골 아저씨 같이 친숙했다.


어수룩한 말투와 순박한 웃음에 신뢰가 갔다. 딜러는 고향 사람 만났다며 더 신경 써 주겠다고 했다. 딜러가 보여준 차는 깔끔했고 가격과 조건도 괜찮았다. 하지만 계약 전 사고 이력을 확인해 보니 그 차는 폐차 직전까지 갈 정도로 큰 사고가 있었던 차였다. 딜러는 간단한 접촉사고만 몇 건 있는 차라고 얘기했었다. 우리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딜러는 어딘가로 전화해서 왜 이렇게 큰 사고가 있던 차인데 얘기해 주지 않았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다른 차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 후에도 중고차 몇 개를 더 보았는데 터무니없이 가격이 비싸거나 하자가 있었다.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광주에서는 중고차 사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날이 저물고 아버지와 나는 중고차 시장에서 나와 광주종합버스터미널이 있는 광천동으로 갔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광천동에서 살았는데 그 동네를 걸어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터미널을 지나 어두워진 동네 길을 한참 걸었다. 한참 걷다가 편의점에 들러 물을 마시고 다시 걸었다.


꽤 긴 거리를 걸었던 것 같다. 걷다 보니 힘이 들었는데 아버지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는 걸으면서 추억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아버지가 살던 동네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걷다 보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서 좋다고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길을 걷고 저녁을 먹기 위해 충장로로 이동했다. 아버지는 시원한 생맥주 한잔 하자고 했다.


생맥주…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특히 생맥주는 물 대신 마시라고 해도 매일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우리는 충장로 길거리가 보이는 맥주집 테라스에 앉았다. 아버지와 내 앞에 거품이 올라와 있는 시원한 생맥주 한잔 씩이 놓여있었다. 건배를 하고 아버지에게 물어봤다. 원래 술 안 마시는 거 아니냐고. 아버지는 너무나 맛있게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얘기했다.


원래 술 좋아한다고.


술을 좋아하지만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대학 졸업을 하고 군대를 전역한 상태였고 동생은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야 좀 후련하다고, 이제는 술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녀 둘을 한꺼번에 대학 교육시킨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고 있었던 짐이 너무나 무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동생과 나는 대학 졸업을 했고 아버지는 이제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생맥주가 마시고 싶었을까.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와 술을 마셨다.

아버지가 생맥주를 마실 때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다음 날 대구로 가서 중고차를 샀다. 깔끔한 거래였다. 내 첫 차는 수동으로 기어 변속하는 하얀색 갤로퍼 이노베이션 밴이었다. 남자는 수동으로 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해서 오토가 아닌 수동으로 샀다. 장난감 같이 생긴 작고 귀여운 2인승 차였다. 아버지와 나는 그 차를 타고 대구에서 완도로,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왔다.


한번씩 도로에서 운행중인 갤로퍼 이노베이션이 보인다.
그때마다 나는 광주 충장로에서 생맥주를 마실 때의 아버지 표정과 시원했던 생맥주의 맛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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