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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악산에서 막걸리 한잔

등산 편

by 봉봉주세용

대학교 4학년 어느 가을이었다. 주말이었는데 일어나 보니 날씨가 좋았다. 자취방에서 머물기에는 아까운 날씨였다. 문득 산에 올라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관악산이 그나마 가까운 산이었다. 집에 있는 빈 가방을 메고 바로 관악산으로 출발했다.


물이나 간식은 관악산 근처에 있는 ATM기에서 돈을 뽑고 사려고 했다. 관악산 입구에 도착해서 ATM기를 찾았는데 돈이 뽑히지 않았다.


주말이라 ATM기에 있는 현금이 떨어진 것이다.


꽤 먼 곳에 다른 ATM기가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금방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돈을 뽑고 밥을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관악산 등산은 처음이었지만 산 이름은 익숙했다. 이름이 친숙해서인지 가볍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있는 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한 준비없이 가벼운 복장으로 산에 간 것이었다. 얇은 면바지에 컨버스 신발을 신고 반팔에 가벼운 자켓을 걸치고 빈가방을 메고 있었다. 빈가방에는 원래 편의점에서 간식과 물을 사서 넣으려고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산 이름에 ‘악’이 들어가면 산이 험하고 거칠다고 한다.
설악산, 치악산, 관악산, 감악산, 운악산 등. 관악산은 해발 629미터의 산으로 산의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도심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연간 700만명의 등산객이 찾는 수도권 대표 산인 것이다.


서울대 입구를 시작으로 한참을 걸어서 관악산 입구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관악산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연주대 쪽으로 가기로 했다. 초반에 올라가는 길이 돌길이었는데 나름 밟는 재미가 있었다. 돌길을 거치고 계단을 오르고 깔딱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연주대 가는 길에 들어섰는데 그때부터는 절로 악소리가 나왔다.


능선을 따라 기상레이더와 연주대가 보였는데 가는 길이 어려웠다. 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미끄러질 것 같았는데 등산화를 신고 있지 않으니 더 겁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산인데 어떻게 이 길을 지나다녔을까 싶었다. 한걸음씩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기며 겨우 산 정상에 도착했다. 시야가 좋지는 않았지만 정상에서 멀리 서울 시내를 바라보니 머리가 씻기는 것처럼 시원했다. 어렵게 올랐지만 보람이 있었다.


산 정상 근처에서는 막걸리를 잔으로 팔고 있었다. 그냥 올라가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막걸리를 갖고 정상까지 왔을까 싶어 신기했다. 사람들이 서서 막걸리를 시원하게 한잔씩 마시고 있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올라간 산이라 내내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옆에서 막걸리 마시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서성였다.


막걸리 한잔이 그렇게 마시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가방은 메고 있었지만 물도 없었고 간식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고 내려가는데 갑자기 생각났다. 며칠 전 헌혈을 했는데 그때 받은 3천원 문화상품권이 가방 앞 주머니에 있었던 것이다. 막걸리를 파는 아저씨와 둘이 남았을 때 조심스럽게 사정을 설명하고 문화상품권으로 막걸리 한잔 마실 수 있는지 물어봤다. 다행히 아저씨가 흔쾌히 허락해 줬다.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오이 한 조각을 먹었다. 그것만으로도 관악산에 올라간 의미가 있었다.


관악산 정상에서의 막걸리 한잔.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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