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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칠리 Jul 19. 2022

08 | 연애는 나가서 해주세요!

직장 상사의 사내연애

너네 존X 싸가지 없는 거 알지.


어느 날, 책임이 갑자기 경력자들을 불러 모았다. 브랜드 별 메인 담당자들을 호출한 것이다. 이렇게 모이는 일은 종종 있었기에 그날도 전달사항이 있나 싶었다. 그런데 대뜸 책임은 우리가 싸가지 없다며 욕했다.



아래 애들이 실수를 하면 너희가 책임을 져야지. 왜 애들이 사과를 해.


들어보니, 신입이 낸 사고를 왜 신입이 수습하냐는 것이었다. 유니가 A브랜드 부사수로 일할 때, 연달아 같은 사고가 터지니 사수가 참지 못하고 유니에게 수습하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였다.


부사수가 사고를 치면 사수가 사과해야 한단다. 맞는 말이다.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사수가 있는 거니까. 그런데 그게 왜 싸가지 없다는 것과 연결되는 걸까. 한번 타이르면 될 것을.



너네가 이렇게 일하면 나중에 다른 프로젝트 할 때 누구를 데려가고 싶겠니.


책임은 우리에게 야근도 안 하면 어쩌냐고 물었다. 누가 그런 직원을 쓰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정말 어쩌라는 걸까. 야근은 업무가 밀린 사람이 하는 것이다. 당일 업무를 제시간에 다 끝내고 정시에 퇴근하는 게 왜 나쁜 것일까.


하지만 책임은 야근하는 사람이 열정적이고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야근을 해서라도 다른 프로젝트까지 하는 게 맞다나. 본인도 안 그러면서. 어딘가 비틀어진 생각을 정론으로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야근수당이라도 주면 모를까. 왜 내가 계약한 근무시간과 연봉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착각한다. 초과 근무는 신입의 열정이 아니라, 회사의 '노동 착취'다. 착취를 당하며 성장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만큼 비효율적인 성장도 없다.



일하기 싫으면 말해. 너네 아니어도 신입 애들 데리고 하면 되니까.


책임은 우리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우리 모두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 옆에 앉은 분들은 주임, 대리급의 경력자들이었다. 그런 사람들보다 신입이 낫다니. 그건 구겨진 자존심에서 나오는 허세였다. 슬슬 경력자들이 책임을 피해 다니니 위기감이라도 느꼈나 보다.



너 없어도 괜찮아. 유니 데리고 일하면 돼.


그렇지 않아도 책임은 내가 10개월 차쯤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조용히 일만 했는데, 그는 이유 없이 내 쓸모를 운운했다. 꼭 유니를 언급하며. 유니가 내 부사수가 된 뒤로는 정도가 더 심해졌다.



책임님께 성추행 당했어요.


쓸데없는 갑질이라며 넘기려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유니와 동료 여직원이 책임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니가 당한 정도가 심했다. 저녁에 유니를 불러 같이 술을 마시거나, 주말에도 연락한다고 했다. 유니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여직원들끼리 똘똘 뭉쳐요. 책임이 담배 피우러 가자고 하면 누구 한 명 슬쩍 따라가고.


우리는 바로 대책을 세웠다. 둘 다 흡연자였기에 흡연장에서 책임과 단둘이 되는 일이 잦았다. 그대로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누가 전화하는 척이라도 하며 테라스로 따라 나가자고 했다. 신고나 수석님과의 면담을 먼저 제안했으나, 아직은 못하겠다고 해서 세운 대책이었다.



아직 유니 가르치고 있니? 유니한테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나오라고 해.


그런데 책임은 도를 지나쳐 나에게까지 유니를 찾았다. 나는 책임이 유니를 불러내지 못하게 일부러 유니 옆에 붙어 인수인계를 질질 끌었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지자 책임은 구태여 내게 유니를 불러달라고 전한 것이다. 내가 막으려고 했는데, 유니는 가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유니는 한참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책임님이 불러서 밑에 카페 왔어요. 도와주세요.


한참 후, 유니의 SOS 신호가 울렸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일부러 급하게 책임을 찾았다. 마침 이슈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가 필요했다. 일사불란하게 연락을 돌리고, 수석님께도 책임이 자리를 비웠음을 전했다. 다행히 그는 금방 올라왔다.


그 뒤로 유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자기와 같이 일하자고 했다나.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며, 책임이 유니를 불러낸 채팅 내용을 동료들에게 말했다. 나에게까지 유니를 불러달라고 했던 그 말 말이다.


하지만 유니는 딴 소리를 했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나오라 하더라 했는데, 유니는 그런 건 아니었다며 순화하려고 애썼다. 의아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말하기 싫은 수도 있겠다 싶어 넘겼다.


그런데 웬걸. 안 좋은 직감은 항상 맞는다더니. 돗자리라도 깔아야 할 판이 됐다.



성추행이 아니라 썸이던데.


책임이 유니를 카페에 끌고 갔던 날, 유니와 다른 피해자분은 수석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수석님은 충격을 받아 작은 회식 겸 저녁 식사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몰랐냐며 물었다. 그런데 며칠 뒤 돌아온 말이 이것이었다. 썸. 간혹 피해자를 헤아리지 못하고 사랑으로 치부하는 일도 있으니 일단 말을 들어보았다.



보니까, 유니가 먼저 밥 먹자 하고 술 먹자 하고 그랬던데?

그걸 좋다고 따라간 책임도 미쳤지만, 유니 걔도 조심해야겠더라.


수석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책임이 유니와의 모든 채팅 기록을 공개했단다. 그것을 보니, 책임의 일방적인 추행이 아니라 상호 쌍방이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나와 동료들은 머리가 땡 해졌다.


분명 유니는 책임이 자신을 추행했다고 했다. 끔찍하고 혐오스럽다는 소리도 몇 번이나 했다. 그런데 채팅에서는 유니가 먼저 책임에게 저녁이나 술을 권했다. 저보다 14살 어린 여직원의 권유에 홀라당 넘어간 책임도 미쳤지만, 본인이 먼저 권하고는 성추행범으로 만들다니. 세상이 참 요지경이구나 싶었다.



거짓말에 놀아났구나.


가장 먼저 느낀 건 배신감이었다. 우리에게 책임을 욕하면서 고통스러운 척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가 같이 화내고, 본인을 보호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동시에 진짜로 피해를 입었던 다른 동료분이 걱정되었다. 같은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얼마나 당혹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을까. 어쩐지, 수석님께 고발 후 다른 동료분은 증거물과 경위서를 제출했는데, 유니는 끝까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결국, 유니는 피해자를 가장한 제2의 가해자였다.


다 듣고 보니, 책임의 이유 모를 그 갑질들의 원인이 퍼즐 맞추듯 맞춰졌다. 생각이 차게 식었다. 책임이 내게 유니를 들먹이며 나무랐던 것도, 유독 유니의 실수를 감싸고, 유니에게 경력에 맞지 않는 업무와 위치를 주려고 했던 것도. 전부 둘의 썸질에 놀아난 것이었다. 아, 정말 이 회사 난장판이구나.



그냥 욕해버려. 야근도 좀 시키고.


정말 우스운 건, 유니와의 관계가 깨지고 책임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는 것이다. 입에 유니를 달고 살던 책임은, 이제 유니에게 욕을 하라고 했다. 딱 내가 인수인계하기 너무 힘들다며 울음을 터트린 날이었다.


그때 내가 울었던 건 책임이 나에게만 발전을 강요해서도 있지만, 그게 다 그들의 사랑놀이의 일환이었다는 게 화가 나서였던 게 컸다. 내가 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는데 희생당해야 하는가. 그 억울함만 해도 커다란데, 사이에 시말서도 썼고 다른 자잘한 일들도 있었으니 서러움이 터질 수밖에.



그 뒤로 책임도, 유니도, 그 누구도 나가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면 누구 하나 퇴사할 법한데. 책임은 우리가 그 일을 모르는 줄 아는 것 같았고, 유니는 계속 피해자인 척 살았다. 그 사이에 낀 나만이 양쪽에서 나오는 서로의 겨냥질을 들을 뿐이었다.


진흙탕물과 같은 치정 싸움이 이렇게 흐지부지 막을 내리나 싶었다. 그런데 이 회사가 어디 허무한 결말이 있던가. 더 극적인 반전만 있지. 영화나 소설도 이보다 더할 순 없겠다.


얼마 후. 유니가 사라졌다.





*본 글은 시리즈로, 이야기가 다음 회차에 이어집니다.


이미지 출처

Photo by Dollar Gil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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