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제가 하고 싶었는데요
119를 불러야 하는 거야, 아님 잠수를 탄 거야?
책임과 유니의 사내 스캔들이 터진 후, 당사자인 둘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출근했다. 둘 중 한 명이 그만 둘 법도 한데 꿋꿋이 다니는 걸 보고 둘 다 멘탈이 강하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니가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연락 두절에 수석님께서는 아파서 쓰러진 건지 아니면 잠수를 탄 건지 연락 좀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말만 흘러나왔다. 이건, 잠수였다.
그렇게 유니는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퇴사 의사를 밝힌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무단결근으로 처리하며 유니의 연락을 기다렸고, 하루 이틀 뒤 수석님이 회의실로 날 호출했다.
유니가 너 때문에 퇴사하는 거라던데. 무슨 일 있었어?
하아. 수석님의 말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동네북이지 진짜. 욕이 나왔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은 아니라 나는 먼저 유니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아... 제가 선을 넘은 게 하나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일단 수석님께는 사과부터 드렸다. 내가 1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기도 했다. 선 사과, 후 대처. 누구나 먼저 죄송하다고 하면 상대도 욕을 100번 할 걸 한 50번만 해준다. 어차피 욕먹는 건 똑같지 않느냐고? 내가 개가 되느냐 썩은 음식물 쓰레기가 되느냐의 차이다. 차라리 귀여운 개가 낫지.
나는 수석님께 덤덤히 유니와의 일과 책임-유니 사이에서 받았던 불합리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니가 퇴사 사유로 말한 것은 아마 유니가 꾀병으로 병가를 내기 하루 전 날의 일일 것이다.
스캔들 이후 몇 주가 지났을 무렵. 나는 부사수 유니의 업무 방식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책임이 내게 욕이라도 해서 해보라고 했고, 나는 그러지는 않겠다며 선언했다. 그런데, 내가 끝까지 참을 수 있었으면 이미 부처고 성인군자 아니었을까.
그날은, 유독 유니의 실수가 잦았다. 이전 브랜드에서 작업해 봤던 업무도 빈번히 오류가 났고, 수정을 맡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심지어 입사하자마자 배워서 지금까지 매일 썼을 작업기록표 마저 제대로 쓰지 못했다.
뚝. 정말 이런 소리가 나는 줄 몰랐는데. 머릿속 어딘가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더 이상 참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소리를 치거나 욕을 하지 않으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일정표(작업기록표)에 적지 않으면 그날 업무를 하나도 안 한 게 돼요.
저희는 고객사한테 업무량을 보고하고 그에 맞는 계약금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면 유니님은 오늘 일을 안 한 게 되는데, 회사에서 월급을 어떻게 줘요?
나는 최대한 참고 참으며 말을 내뱉었다. 유니는 마지막 문장에 꽂힌 것 같던데, 그럴 만하다. 나도 내뱉고 나서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부분이었으니까. 이래서 사람은 살아온 주변 환경이 참 무섭다고. 백날 이런 말을 들으니 나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었다. 우리는 대행사다 보니 매주 그리고 매달, 우리가 수행한 업무를 고객사에 보고한다. 고객사는 우리가 계약한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우리는 수행한 건이 계약한 건 수보다 많이 늘어나진 않았는지 확인하며 계약 사항을 조율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 업무량을 수치로 나타내기 위해 적는 것이 작업기록표였다.
적는 것도 단순하다. 간트차트 형식을 차용했는데, 엑셀 표에 '업무내용/건수/요청자/작업시작일/완료일'을 작성하면 되었다. 웬만한 신입들도 곧잘 하는 단순 업무였다. 하지만 유니는 자신이 한 업무를 대부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날의 일만도 아니었다.
이참에 그만두려고 했나 보네. 근데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유니의 업무 태도, 책임의 대응, 유니-책임 사이에서 받았던 나의 스트레스 등도 수석님께 털어놓았다. 수석님은 의연하게 말씀하시며 내게 왜 자신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당연히 못하죠,라고 말하고 싶었다. 일전에 책임에 대해 면담을 요청했을 때도 그러려니 받아들이라고 했던 사람에게 어떻게 또 속을 터놓겠는가.
계속 해결이 안 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이번에도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고, 수석님은 그러려니 하며 그래도 신고 사유가 될법한 말은 삼가라고 주의를 주셨다. 나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참에 다시 한번 꼰대가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그런데 다음으로 들은 말은 내 인류애를 박살 냈다.
유니가 책임한테는 너 때문이라고 하고, 경영지원팀에는 책임 때문이라고 했다더라고.
또. 또 그놈에 이간질. 대단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그 말에 나는 내가 유니에게 화를 낸 바로 다다음 출근 날. 유니가 갑자기 아프다며 병가를 냈던 금요일을 지나 월요일 아침에 걸려왔던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유니도 잘 하고 싶은데 잘 안되나 봐. 오늘은 좀 잘해 줘.
그날은 내가 출근하기도 전에 책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유니에게 잘해주라는 이야기. 들어보니 유니가 책임에게 하소연을 했단다. 그걸 듣고 둘이 지겹지도 않나 싶었다. 그래도 원래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어야 한다고. 나도 잘해주려고 했기에 네네 거렸다.
가뜩이나 그 일이 있고 아프다며 회사를 빠진 유니였다. 나는 내심 유니가 내 말에 상처받아서 힘들어할까 봐 걱정됐다. 그래서 다시 잘해주자고 마음먹었는데 유니가 병가를 냈고, 내 고민은 더 커졌다. 그런데 웬걸. 그 전화를 받고 출근해 보니 유니의 책상이 비워져있었다. 그다음에 들은 게 그 사람의 이간질이었고.
잠시나마 유니를 걱정했던 내 모습이 하찮게 느껴졌다. 내가 유니에게 선을 넘은 건 있었지만, 사과하기는 싫어졌다. 내가 유니에게 사과하면 유니와 책임 사이에 끼워져 구워삶아졌던 지난날의 나는 뭐가 되는 걸까.
결국, 유니는 그렇게 떠났다. 퇴직자에게 굳이 연락을 더 하는 건 오히려 그 사람이 부담을 느낄 것이라 생각해서 나도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나는 곧장 팀의 에이스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유니의 퇴사사유에 오른 건 유니의 탓이 아니라 책임의 소행인 것 같다. 이 글을 적으며 수석님과의 대화를 복기해 보는데, 책임이 수석님께 내 이야기를 한 것이지 유니가 수석님께 말한 게 아니었다. 즉, 책임이 나를 유니의 퇴사사유로 내세운 것이다. 내가 유니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도 알 것이고, 유니도 나름 썸을 탔으니 하소연도 꽤 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내세워 자신의 죄를 감경하려고 한 것이겠지. 누구의 잘못이든 상관없다. 과거의 나에게 있어 둘은 똑같은 존재였으니까.
*본 글은 시리즈로, 이야기가 다음 회차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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