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36
바쁜 일정 중에도
여행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바르셀로나에 온 지 삼일째 점심, 우리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호텔에 머물며 문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현장 근처에서 대기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버려질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중, 한 통의 연락이 들어왔다.
바르셀로나에 와 있다는 우리의 소식을 들은 친한 업체 대표님이었다. 알고 보니 그분 역시 S전자의 MWC 전시 컨텐츠 개발 파트너로 참여해 현장을 지원하러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뜻밖의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숙소 위치를 물어보니 그라시아 거리(Passeig de Gracia) 근처라고 했다. 다행히 우리 숙소와 멀지 않은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날도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독립 시위로 분주했다. 평소에는 대로를 따라 행진하는 정도였지만, 하필 약속이 있던 날에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그라시아 거리까지 인파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시위대 사이를 조심스레 뚫고 지나서 겨우 약속 장소인 타파스 레스토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반가운 얼굴이지만, 같은 ‘대감집 머슴’ 처지로 해외에서 마주하니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대표님은 혼자 이 곳에 나와서 낯선 거리를 잘 몰라 대부분 맥도날드 햄버거로 끼니를 때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괜스레 마음이 쓰여, 메뉴를 이것저것 주문해 함께 나눠 먹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리 중 하나가 바로 ‘꿀대구’다. 살이 두툼한 대구를 꿀, 알리올리 소스, 치즈와 함께 구워낸 요리로,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그 외에도 스테이크와 푸아그라 등을 주문해서 푸짐하게 한 상을 차리고, 가볍게 맥주와 와인까지 곁들이니 제대로 된 만찬이 되었다.
사실 우리 역시 호텔방에 틀어박혀 문서 작업에만 몰두하던 터라, 이렇게 외부에서 식사하니 마치 함께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어 새삼 들떴다.
다음날, 우리는 새벽 일찍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오늘의 일정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만 하다가 돌아가면 아깝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진짜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바르셀로나 근교의 대표적인 여행지, 몬세라트(Montserrat). 이름 그대로 톱니로 잘라놓은 듯 뾰족한 바위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독특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산 정상에는 수도원이 자리하고, 그 안에는 카탈루냐의 수호 성녀로 여겨지는 검은 성모 마리아상(La Moreneta)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에스파냐 역까지 이동한 뒤, 기차로 갈아타고 몬세라트로 향했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다시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하는데, 가파른 경사를 따라 꾸준히 올라가는 그 길이 인상적이었다. 열차가 오르막을 굽이치며 올라갈 때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몸이 뒤로 살짝 기울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순간순간 산허리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지날때면 긴장감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마침내 수도원에 도착했다.
수도원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식당이었다. 마치 매점 같은 분위기의 자그마한 푸드코트였는데,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남아 있는 메뉴는 단 하나, 토마토 파스타 위에 치즈를 흩뿌리고 그 위에 커다란 닭다리를 얹은 요리였다. 겉보기에는 푸짐해 보였지만, 막상 받아보니 이미 오래 전 조리된 듯 미적지근했고, 맛도 어디선가 한 번쯤 먹어본 듯 평범했다. 그런데 가격만큼은 수도원의 명성에 걸맞게 ‘인내심’을 시험하는 수준이었다. 순간 ‘혹시 이곳 수도사들도 이런 음식을 매일 참고 먹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배가 고파 결국 꾸역꾸역 먹었지만, 아침을 거르고 서둘러 나온 선택이 마치 수도자의 고행 체험을 자처한 꼴이 되어버렸다.
허기를 달래고 식당을 나서, 본격적으로 목적지인 검은 성모 마리아를 보기 위해 수도원 안쪽으로 향했다. 성모상은 건물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곳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입구부터 길게 늘어선 줄이 복도를 따라 이어졌고,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성모상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성모 마리아상이 이름처럼 어두운 색을 띠게 된 이유는, 본래의 조형물 위에 발라진 니스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 검게 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모상은 무릎 위에 아기 예수님을 앉힌 형태였고, 오른손에는 작은 구체를 들고 있었다. 전신은 강화유리로 보호되어 있었지만 유독 오른손의 구체만큼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방문객들은 그 구체에 손을 얹고 소망을 빌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곳은 단순한 종교적 공간을 넘어, 누구에게나 소망을 빌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은 듯했다.
우리도 차례대로 줄을 서서 성모상 앞에 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관습처럼 구체에 손을 얹고 사진을 남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탈루냐의 수호 성녀’라는 대단한 타이틀에 비해 특별한 감흥이나 압도적인 경외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유명한 명소에서 한 번쯤 거쳐야 할 의식을 치른 듯한 기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사업이 잘 풀리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아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모상을 만난 뒤 2년 뒤 카카오에 회사를 팔고 엑싯을 했으니, ‘결국 내 기도를 들어준 건가?’ 싶기도 하다. 어라, 꽤 영험한데.
수도원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관광지 정도로 여겼지만, 이곳은 분명히 ‘산’이었다.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트래킹 복장을 제대로 갖춘 모습이었고, 그 사이에서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의 우리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괜히 도전 의식이 올라 잠시 험한 바위산을 오르려 했지만, 이내 현실적인 한계를 느끼고 금세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산할 때는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올라올 때 산악열차가 탑승의 재미를 주었다면, 케이블카는 발아래 펼쳐진 절경으로 시선을 붙잡았다. 산과 계곡, 바위들이 길게 이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자연 조각처럼 보였고, 그 장관을 바라보니 ‘천혜의 자연’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문득, 이 웅장한 수도원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그 아래를 받치고 있는 단단한 돌산 덕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거대한 건축물도, 수백 년의 세월도 결국은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는 법이었다. 그제야 ‘돌산 위에 세워진 수도원, 몬세라트’의 진가가 눈에 들어왔다.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만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수도원과 산, 그리고 탁 트인 풍경 속에서 느낀 여유와 깨달음은 분명 여행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다음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 반석 위에 세운 집은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