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35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MWC 의 계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망해가던 게임 회사를 VR 컨텐츠 개발사로 피벗하던 당시, 나에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고, 붙잡을 수 있는 무엇이든 필요했다. 다행히 그 선택은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VR은 주목받는 기술이었고, 우리는 지난 1년간 운 좋게 그 흐름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의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오프라인 중심의 VR 사업은 기대만큼 오래가지 못했다. 현장을 발로 뛰며 직접 확인할수록 점점 더 분명해졌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이라는 사실이었다.
2019년 2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분명해졌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제작 능력이 아니라, VR이라는 플랫폼 위에서 온라인적 요소를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것과, 우리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무렵, 우리는 작년에 이어 S전자의 협력사 자격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Mobile World Congress) 2019에 한번 더 참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의무감으로 떠난 여정이었지만, 익숙한 그 도시에서 나는 뜻밖에도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리켜 주는 힌트를 얻게 된다.
우리가 대구로 본사를 옮긴 건 단순한 주소 변경이 아니었다. 기존의 컨텐츠 개발사에서 기술 중심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그 전환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나는 ‘TIPS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있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주관하고 민간 투자사가 주도하는 TIPS 프로그램은, 기술 기반 창업팀을 선발해 약 10억 원 규모의 연구개발 지원금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정부 지원 사업이다. 나는 투자사와 발맞추며 수십 장의 신청서와 백여 장에 이르는 사업계획서를 준비해야 했고, 매일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달력은 어느새 2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MWC 2019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작년부터 S전자의 협력사로 활동해 왔고(11화 참고), 올해 역시 S전자가 MWC 공식 부스와는 별도로 VIP 고객을 위한 전시 공간을 마련하면서, 우리는 AR 신기술 파트너사로서 시연 컨텐츠를 제작해 전시를 지원하게 됐다.
한창 바쁜 시기였지만, 멤버들 모두가 최선을 다해 개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혹시 모를 리스크에 대비해 대기 인력들이 현장에 직접 가야 했다.
문제는 출국 일정이 TIPS 준비와 정확히 겹쳤다는 점이었다. 제출해야 할 자료 대부분이 여전히 미완성이었고, 결국 현지에서도 작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와 친구는 각종 서류와 업무용 노트북을 가방에 챙겨 넣은 채, 작년과 같은 루프트한자 항공편에 올라 독일 뮌헨을 경유해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작년에는 바르셀로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시내 외곽의 에어비앤비에 머물렀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골목 구석구석까지 직접 발로 뛰며 익혀둔 덕에, 이제는 나름 이 도시를 잘 아는 듯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래서 이번 출장에서는 중심지인 카탈루냐 광장 인근, 이동 동선이 편리한 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도착은 늦은 밤이었다. 짐을 풀 겨를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리 한복판이 대규모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곧 여기가 스페인 중앙정부와 오랜 갈등을 이어오고 있는 자치지역, 바로 ‘카탈루냐’의 중심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바르셀로나는 수백 년에 걸친 독립운동의 역사를 품은 도시다. 돌이켜보면 작년에 누캄프(Nou Camp)에서 FC 바르셀로나의 홈경기를 관람했을 때도, 경기 시작 전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카탈루냐 깃발을 흔드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는 단순한 응원 문화쯤으로 여겼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상징적 행동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올해의 바르셀로나는 확실히 달랐다. 도심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특히 우리가 머문 숙소가 중심지와 가까웠던 탓에 시위대와 자주 마주쳤다. 일반 관광객이라면 꽤 불편했을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주요 명소는 대부분 둘러본 상태였다. 게다가 이번 출장은 철저히 컨텐츠 전시와 TIPS 서류 준비에 집중해야 하는 일정이었기에 다행이었다.
오히려 일정이 없는 시간에는 호텔에 머물며 조용히 자료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고, 시위대 역시 비교적 외부인에겐 평화로워서 아무 위협도 없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MWC 전시장에 상주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일정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오전에는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 행사장 근처에서 대기했고, 오후에는 호텔방에 틀어박혀 문서 작업에 몰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곤 했다.
둘째 날 저녁, 우리는 호텔 근처의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현지 음식에 마음이 설렜다. 샹그리아 두 잔과 감바스를 주문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스페인산 올리브 오일의 깊은 풍미에 바르셀로나 항구 도시 특유의 신선한 해산물이 더해지니, 그 조합이 완벽했다. 탱글탱글한 새우에 진한 오일과 마늘 향이 어우러져, 씹을수록 은은한 바다 내음이 퍼졌다.
샹그리아의 맛은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한국에서도 몇 번 마셔봤지만, 현지의 그것은 도무지 흉내 낼 수가 없다. 달콤하면서도 과실 향이 풍부하고, 한 모금만으로도 기분이 화사해졌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는 술. 어느 순간 취기가 훅 올라오는, 은근히 위험한 매력이 있었다.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문득 말했다.
“바르셀로나까지 와서 계속 호텔방에만 있는 건 좀 아깝지 않아?”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아직 가보지 못한 외곽 여행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에게는 덜 알려졌지만 분위기 있는 한적한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몇 군데를 골라, 짬을 내어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이왕 온 김에, 아무리 바빠도 즐길 건 즐기자. 그렇게 말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잔을 부딪쳤다.
다음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 반석 위에 세운 집은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