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33
이번 타이베이도
실망과 당황의 대환장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TWTC(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로 향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대만게임쇼 2019가 시작되는 날이다. 출근길은 직장인들로 분주했고, 마음 한켠에는 기대인지 걱정인지 모를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는 길에 우연히 대만의 유명 VR 프랜차이즈 매장을 발견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옆에는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레노버(Lenovo) 매장도 눈에 들어왔다. 내부에 VR 기기들이 전시되어 있었기에, 점심 무렵 다시 와서 직접 체험해보기로 마음먹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이 두 번째 B2B 부스 참가라 그런지, 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침 일찍 도착해 통역사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뒤, 짜여진 빽빽한 미팅 일정에 따라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시장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와 발걸음 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B2C, B2B 부스 할 것 없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다양한 국적의 게임 퍼블리셔와 바이어들이 모여 서로의 관심사와 비즈니스 기회를 논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대만이 점차 아시아의 새로운 게임 허브로 자리 잡으려는 기운이 현장 곳곳에 묻어났다. 열띤 협상과 소개가 이어지는 가운데, 숨 쉴 틈 없이 분주한 오전 시간이 어느새 빠르게 흘러갔다.
겨우 한숨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아침에 스쳐 지나갔던 VR 관련 매장들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현실은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유명하다는 VR 프랜차이즈 매장은 텅 비어 있었고, 손님은 물론 직원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레노버 매장에는 간신히 몇몇 직원이 있었지만, VR 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거나 손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은 없었다. 전반적으로 이들 매장은 한산한 분위기였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적잖이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기분 전환겸 점심을 먹었다. 선택한 곳은 일본 라멘 브랜드 ‘이치란’으로, 마침 가까운 곳에 지점이 있었다. 전날 훠궈를 먹은 탓인지 속이 조금 쓰린 느낌이 있었기에, 밥 한 공기를 추가해 걸쭉한 돈코츠 국물과 함께 속을 달랬다. 해외 어디를 가든 라멘만큼 든든한 국밥 대용품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국밥집들이 더 많이 수출된다면 좋겠지만.
오후엔 드디어 줄곧 러브콜을 보냈던 대만의 대표 LBE VR 업체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게 바로 느껴졌다. 그들은 요즘 상황이 매우 어렵다며, 기존 프랜차이즈 사업은 거의 모두 접은 상태라고 했다. 대신 테마파크처럼 특정 랜드마크급 공간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는데, 그 공간에 배치할 컨텐츠로 우리 게임을 거의 공짜로 제공해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불현듯 중국의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 한다면서 대만 기업이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을 방법이 없겠냐는 질문까지 던졌다. 도무지 동의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당황과 불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미팅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게임쇼 첫날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 숙소에 짐을 가져다 놓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찾아간 곳은 ‘키키 레스토랑’이라는 대만 현지에서 꽤나 유명한 식당. 알고 보니 이곳은 매콤한 사천 요리로 소문난 곳이었다. 전날 훠궈를 먹으며 이미 한 차례 매운 맛을 경험한 터라 뱃속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기에 과감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대표 메뉴인 부추꽃볶음과 연두부 튀김이었다. 일반적으로 매운 음식들이 단순히 ‘맵기’에만 치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의 사천 요리는 조금 달랐다. 매운맛 뒤에 고소함과 풍부한 향신료의 조화가 살아 있어, 타이완 비어와 함께 먹으니 서로 훌륭하게 어울렸다.
입안이 제법 얼얼해지는 기운이 느껴졌지만, 맛 자체가 워낙 좋아서 젓가락이 계속 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라면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맵찔이’지만, 아마 보통의 한국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매운맛은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식당 안의 분위기도 매우 화기애애해서, 낮 동안의 실망감과 불쾌감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역시 맛있는 음식과 좋은 분위기는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
저녁 식사 후, 친구와 함께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타이베이 101 타워 근처를 산책했다. 그런데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눈에 띄었다. 무슨 줄인지 궁금해 물었더니, 바로 ‘웨이브(WAVE)’라는 유명 클럽 앞 대기줄이라고 했다.
외국 클럽들은 대체로 입장이 까다롭지 않고 ‘입뺀’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한 번쯤 구경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긴 줄을 감당할 자신도 없고, 아재들끼리 물 흐리지 말자고 다독이며 금방 포기했다. 대신 바로 옆에 있는 노천 펍으로 자리를 옮겨서 밤의 여흥을 즐기기로 했다. 친구와 데킬라 잔을 부딪히며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수많은 미팅과 현장의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만 업체들과 마주한 현실적인 상황,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이 화제에 올랐다. 결국 우리의 생각은 하나로 모였다. LBE VR, 즉 오프라인 기반의 VR 사업은 이제 확실히 한물간 흐름이라는 점이었다. MOU라도 체결해 주최 측에 그럴듯한 ‘성과 선물’을 안긴다는 건, 지금 시점에서는 무의미했다. 오히려 대만 업체들이 우리에게 더 기대기 전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해 보였다.
그렇게 우리가 오프라인 사업을 과감히 포기하기로 결정한건 합리적인 선택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도전에 대한 부담도 상당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온라인으로 전환해 모멘텀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실은 서로 공감했지만,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경쟁은 치열하고, 그 속에서 잘 해나가는 것 외에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는 현실이 더욱 뼈아프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동안 오프라인 사업을 주력으로 목숨을 걸어온 타 한국 업체들은 과연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우리는 그들의 행보가 궁금했고,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급변하는 시장 속에서 그들이 어떤 전략으로 살아남으려 할지, 또 그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기회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내일은 국내에서 오프라인 사업을 이끌고 있는 대표님들과 이야기를 더 나눠봐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데킬라 샷을 털어넣었다.
다음편, '대만 타이베이 : 왜들 그리 다운돼있어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