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베이 : 왜들 그리 다운돼있어 3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34

by chill십구년생guy


섯불리 판단하고 움직이면
본질과 흐름을 놓친다는 사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마치 출근하듯 대만게임쇼 2019가 열리는 TWTC로 향했다. 어제까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었지만, 이제는 대만 업체들에 대해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명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마음도 훨씬 가벼웠다. 부담도, 갈증도 없이 예정된 미팅들을 하나씩 소화하면 그만이었다.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다른 부스를 염탐하는 내 모습



미팅 스케줄 사이사이에는 틈틈이 행사장을 둘러보며 다른 부스의 분위기를 살폈다. 따로 약속이 잡히지 않은 부스의 대표님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잠깐씩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서로 조심스럽게 웃으며 던지는 말 속에는 공통된 현실 인식이 담겨 있었다. 다들 대만 시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고, 세계적으로도 오프라인 기반 사업은 점점 더 버티기 힘든 구조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이번 쇼에 들고 나온 건 작년에 만들어 둔 컨텐츠들인데요, 더 이상 추가 개발은 안 하려고요."


이런 말이 부스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 말 속엔 누군가의 진지한 결단이, 또 누군가의 체념이 담겨 있었다. 오프라인 시장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쎄한 느낌은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기를 먹으러 고기로



게임쇼 일정을 마친 뒤, 주최 측에서 마련한 공식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조용히 빠져나왔다. 굳이 형식적인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따로 약속한 저녁 식사가 더 중요했고, 솔직히 의미도 없어 보였다.


저녁엔 게임쇼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오프라인 VR 시뮬레이터 사업을 하고 계신 한국 대표님 한 분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동먼(東門)역 근처의 유명한 중식당, ‘까오지(高記, Kao Chi)’.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고기’라는 이름인데 이곳의 명물인 동파육을 맛보러 일부러 선택한 곳이었다. 고기를 먹으러 온 식당이 ‘고기’라니. 아재개그 스러운 라임에 혼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리에 앉아 동파육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음식을 푸짐하게 주문했고, 대만을 대표하는 술인 금문고량주도 함께 시켰다. 기름진 중식에는 화끈하게 정리해주는 고량주를 곁들이는게 정석이다. 음식을 먹고 텁텁한 입안을 짙은 향과 알싸한 기운으로 씻어주듯 헹궈주면, 금방 다시 젓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



위스키인 카발란과 더불어, 대만을 상징하는 술인 금문고량주



기대했던 대로, 동파육은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살짝만 손을 대도 갈라지는 고기, 입안 가득 퍼지는 쿰쿰하고 진한 풍미. 그야말로 ‘소문난 집엔 이유가 있다’는 말을 증명해주는 맛이었다. 덕분에 술도, 시간도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하지만, 대화 내용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함께 자리한 대표님은 이미 대만의 다른 지역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개발한 컨텐츠를 팔기 위한 여정이었고, 내일은 다시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향한다고 했다.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다니며, 판로를 찾기 위한 영업의 연속이었다.


“진짜 바이어들은 왜 게임쇼에 안 나오는 걸까요?” 내가 묻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전시회 참가할 여력은 없다는 거죠.”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 게임쇼에 나온 업체들 중 다수는 중국에서 들여온 시뮬레이터 재고를 처분하려는 목적이 크다고 했다. ‘전시’보다는 ‘떨이’에 가까운, 소위 재고 처리장 같은 분위기라는 것이다. 낮에 만났던 몇몇 한국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았던가. ‘떨이와 떨이의 만남’이라니. 음식 맛과는 무관하게 입맛이 떨떠름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다시 TWTC 근처로 돌아왔다. 마침 행사장 인근에서는 간담회를 마친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2차를 이어가고 있었고, 우리도 그중 한 무리에 합류하게 됐다.


놀라운 건 술자리 장소였다. 바로 작년에 내가 '여주' 요리를 먹고 싶어 들렀다가 이상한 맛에 실망하며 나왔던 그 식당이었다. (이 썰은 9화 참고.) 그땐 영 씁쓸하고 낯선 음식이 나왔고, 그 탓에 ‘앞으로 이 집은 절대 아니다’ 라고 기억해뒀던 곳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들 웃으며, 그건 내가 메뉴를 잘못 고른 거라고 단호하게 정리해줬다. 그리고는 그 집에서 유명한 요리들을 잔뜩 시켜줬다. 반신반의하며 한 입 먹었는데, 이게 웬걸. 아주 훌륭했다. 향과 맛의 균형이 딱 맞고, 대만 음식 특유의 고소하고 감칠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순간, 내 머릿속의 선입견이 와장창 무너졌다. 엉뚱한 일부를 맛보고 식당 전체를 싸잡아 판단했던 것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알고서 내린 결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시금 느꼈다.


그건 비단 맛집뿐만 아니라,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설프게 알면서 ‘척’을 하거나 뜬소문만을 믿고 섣불리 판단하면 시장의 본질과 흐름을 놓칠 수 있다. 현장에 뛰어들어 진짜 분위기를 읽고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사람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한껏 들뜬 분위기 속에서 무거운 기분을 제법 날려버릴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현실은 냉정했다. 쓰린 속을 부여잡은 채 겨우겨우 짐을 싸고, 흐린 정신으로 공항행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대만에서의 일정은 막을 내렸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후일담



한국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곧바로 움직였다. 본사를 경기도에서 대구로 이전한 것이다. 이미 수 차례의 검증을 한 바, 이제는 오프라인 분야를 미련 없이 정리하고, 온라인 중심의 기술 연구와 개발에 집중해야 할 시점이라는 판단이 섰다. 대구는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한 거점이었다.


우리는 대구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운영하는 C-Lab 8기에 선발되어, 각종 투자와 지원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겉보기에는 안정된 환경과 기회의 땅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를 내려온 대구 토박이 사업가들의 눈에, 맘모식스는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체리 피커(cherry picker)’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실속만 챙기고 떠날 거라는 의심 어린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대단한 프로그램에 선발됐지만 마냥 맘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문득 그들의 눈엔 우리의 모습이 대만에서 만났던 업체들과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싶다며 간을 보던 그 회사. 여담이지만 나는 후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그들이 실제로 한국에 법인을 내고 국내 지원사업에 신청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어떤 점수를 줬을지는... 그냥 노코멘트로 남겨두겠다.


우리는 지역 안에 녹아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대구에 내려오자마자 DIP(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와 대구테크노파크 같은 현지 기관들을 직접 찾아가 담당자들께 회사 소개를 하며 인사를 드렸고, 창조경제혁신센터 내에 사무실을 만들고 현지 인재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인력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성로에 위치한 게임 아카데미와 채용 연계를 위한 MOU도 체결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다. 말로는 ‘지역 상생’이라 했지만, 현실에선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낯선 외지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허물 수 없는 정서와 거리감 같은 것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도중, 우리는 다음 달 두 나라에 걸친 여정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그것은 온라인 사업 방향을 확장할 수 있는 실마리이자, 대구 지역 관계자들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단서였다.우리에게 새로운 여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 반석 위에 세운 집은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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