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 : 반석 위에 세운 집은 3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37

by chill십구년생guy


반석 위에 세운 집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하루 전날, 몸 상태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날 밤, 마침내 TIPS 지원에 필요한 문서 작업을 마치고 자축겸 들른 모리츠 맥주공장에서 과음을 해버린 것이다. 지중해산 굴에 비어치킨, 그리고 모리츠 맥주까지 곁들이니 ‘이쯤에서 멈추자’는 다짐은 안주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결국 친구와 잔을 부딪치며 또다시 부어라 마셔라로 번졌고, 그 대가는 얄짤 없었다.



바르셀로나에 왔으면 최소한 3일에 한번씩은 모리츠를 마셔줘야



그럼에도 계획을 접을 수는 없었다. 우리에겐 바르셀로나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일정, 바로 ‘피카소 박물관(Museu Picasso)’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20세기 미술의 아이콘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의무적인 학교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작품 제목까지는 몰라도 그의 이름 정도는 익숙할 것이다. 마침 바르셀로나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미 작년에 주요 관광지는 다 둘러본 터라 이번엔 그림 감상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방문했다.


박물관은 고딕 지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다 도착해 보니, 겉모습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성에 가까웠다. 실제로 이 건물은 14세기에 지어진 궁전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했다.



옛날 전화기 같이 못생겼지만 의외로 이어폰 방식보다 편하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박물관에는 우리가 흔히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접해온 대표작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그의 유년기와 노년기에 그려진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고, 잘 알려진 대표작 대부분은 파리 등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 있는 구성이었지만, 오히려 내게는 그 점이 특별한 인사이트를 주게 되었다.


티켓을 끊고 들어서니 입구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할 수 있었다. 기기는 마치 오래된 무선 전화기처럼 생겼고, 귀에 대고 들으면 각 전시실과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단순히 그림만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하나하나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피카소를 ‘괴상한 그림체를 그리는 유명 화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스페인 출신이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독특한 세계관을 지닌 천재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박물관 전시는 그 편견을 단번에 깨뜨렸다. 이곳에서는 유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온 그의 작품 세계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유년기 작품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캔버스 가득 사실적인 묘사로,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정교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이런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후대 작품들이 다르게 보였다. 솔직히 몇몇 작품들은 ‘저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 싶을 만큼 단순하거나 거칠어 보였는데, 그것이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탄탄한 기본기 위에 쌓아 올린 해체와 재구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를 그저 괴상한 화풍의 대가로만 치부했던 내 시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깨달음을 얻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에는, 작년에 에어비앤비로 머물렀던 동네인 개선문 근처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그 앞에 자리한 시우타데야 공원(Parc de la Ciutadella)이 가까워 산책도 할 겸 들러보기로 했다. 주말 오후의 공원은 활기가 넘쳤다. 잔디밭에는 현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여유를 즐기고 있었고, 곳곳에서는 거리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악기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바르셀로나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모든 장소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공원을 걸으며 나는 친구와 이번 여정에서 느낀 점을 나눴다. 몬세라트가 단단한 돌산 위에 서 있었기에 세월을 견딜 수 있었듯, 피카소 또한 어린 시절부터 다져온 기본기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VR에 온라인이라는 개념을 접목시키며 컨텐츠를 덜컥 세상에 내놓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기술적인 단단한 토대를 쌓는 일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다음 여정을 위해



날이 저물자 우리는 호텔이 있는 카탈루냐 광장 쪽으로 돌아왔다. 며칠간 기름진 음식과 술을 많이 먹은 터라, 마지막 저녁은 바르셀로나 겨울철 별미인 칼솟(Calçot)으로 가볍게 해결했다. 숯불에 구운 파를 소스에 찍어 먹는 단순한 요리였지만, 은근한 단맛과 담백한 풍미가 지친 속을 편안하게 풀어주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여정은 이탈리아 로마였다.






후일담



우리의 첫 번째 TIPS 도전은 그만 아쉽게도 실패로 끝났다. 이유는 명확했다. ‘기술’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컨텐츠의 화려함만 주구장창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지원한 프로그램의 취지가 기술 창업 기업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근간이 되는 뼈대와 작동 원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니,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포장에 불과했다. 아직 VR 컨텐츠 개발사라는 과거의 허물을 벗겨내지 못한 모양새였던 것이다.


탈락이라는 결과는 아쉬웠지만, 그 과정을 복기하며 깨달음의 조각들이 하나씩 이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보고 느낀 ‘반석 위의 수도원, 기본기 위의 창의성’이라는 개념은 탄탄한 기술력을 토대로 쌓아올리듯 펼치는 온라인 비즈니스의 모습을 구조화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같은 해 하반기, 우리는 다시 TIPS에 도전한다. 이번에는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온라인 비즈니스 모델과 기술적 연구 개발 목표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마침내 12월, 당당히 선발될 수 있었다.



한 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성공한 터라 더 기뻤다



원래 TIPS는 두 번 도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투자사의 추가 투자와 전폭적인 지지, 주변의 협력 덕분에 가능했다. 특히 기술의 응용과 확장성을 설명하면서 대구시 기관 및 기업들과의 우호 관계를 강조한 것이 제대로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르셀로나에 오기 전까지 ‘체리피커’라는 눈총을 받던 우리가 어떻게 대구에서 신뢰를 얻게 되었을까? 이야기의 실마리는 다음 출장지, 위험천만했던 이탈리아 로마 편에서 펼쳐진다.




다음편, '이탈리아 로마 : 좋던 나쁘던 백문이 불여일견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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