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38
갈 수 없는 곳을 가게 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2021년 5월, 나는 친구와 함께 세운 스타트업의 지분 55.7%를 카카오에 매각하며 엑싯(exit) 했다. 그 무렵 우리를 가장 잘 표현하던 슬로건은 이 한 문장이었다.
“갈 수 없는 곳을 가게 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그건 웬만한 회사 소개 자료나 사업 제안서에는 빠지지 않고 들어가던 우리의 '테마'였다.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을 압축해 담고 있었다.
시작은 지난 2018년 바르셀로나에서 얻은 영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화 참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온라인에 접속해 서로 소통하고, 다양한 컨텐츠를 함께 즐기며 경험을 공유하는 하나의 연결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던 ‘재미’의 본질이자 사업의 미래였다.
또한 이 슬로건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멈춰 섰던 시기에 ‘가상 여행’이라는 모델로 발전하는데, 그건 2019년 2월, 로마에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2019년 2월, 우리는 S전자의 MWC VIP 행사 지원을 위해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원을 위해 왔지만 현장 대기의 의미가 크게 없었다. 사전 준비를 마치고 이미 행사가 시작된 뒤에는 VIP들의 안전 문제로 접근이 철저히 통제되었고, 우리의 시스템 모니터링 역시 대부분 원격으로 이루어졌다.
현장에서 직접 대응할 일이 거의 없다면, 차라리 그 시간을 활용해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2주 일정 중 한 주는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나머지 한 주는 다른 도시에서 보내기로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과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나라 가운데 선택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친구와 나, 둘 다 아직 가본 적이 없고 볼거리도 풍부한 곳이라, 망설임 없이 이탈리아의 '로마'를 골랐다. 그리고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모니터링 의무가 없는 주말을 활용해, 바르셀로나를 떠나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FCO)’. 이름답게도, 공항 한가운데에는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Canon of Proportions)를 형상화한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마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단번에 실감하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숙소는 로마의 중앙 철도역인 테르미니(Stazione di Roma Termini) 근처 호텔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그 명성에 걸맞게 역 주변은 늘 붐볐고, 크고 작은 호텔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격도 비교적 합리적인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관광 명소인 '콜로세움'이 가까웠고, 버스와 지하철이 사방으로 뻗어 있어 이동하기에도 좋았다.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는데, 여기서 첫 번째 난관이 찾아왔다. 로마의 길바닥 상당수가 몇백년 전에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돌 타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유럽엔 옛 흔적이 남아 있는 길이 꽤 많다지만, 전통 보존이 철저한 로마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택시는 덜컹거림을 멈추지 않았고, 승차감은 최악이었다. 오래 앉아 있으니 허리에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기사님은 막히는 큰길을 피해 골목만 골라서 달렸는데, 이동 속도나 풍경 구경은 만족스러웠지만 그 대가로 허리 건강이 희생되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1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낡은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맞이했다. 처음은 짐 때문에 한 두번 이용했지만, 이후로 대부분은 계단을 이용했다. 기계식 특유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낡은 나무의 삐걱거림이 탈 때마다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전통이란 게 늘 낭만만 주는 법은 아니기에, 혹시나 이 머나먼 타국에서 추락사 할지도 모른다며 엄살을 떠는 겁쟁이 아저씨들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짐을 풀자 허기진 배에서 신호를 보냈다. 새벽부터 이동하느라 속은 텅 비어 있었고, 이제는 뭐라도 넣어야 버틸 수 있는 상태였다. ‘로마까지 왔으니 첫 끼는 무조건...!’이라며 고민할 것도 없이 정통 이탈리안을 선택했다. 구글맵을 뒤적이다가 숙소 근처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갔고, 메뉴판 앞에서도 별다른 망설임이 없었다. 피자 한 판, 그리고 까르보나라. 이탈리아에서의 첫 만찬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조합이 있을까.
본토의 맛은 과연 어떨까. 평소 방송에서 보던 이탈리아인들의 음식 ‘부심’을 떠올리며 은근히 기대가 됐다. 먼저 피자가 나왔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국에서 흔히 맛보던 화려한 토핑이나 과한 감칠맛 대신, 재료 본연의 맛이 담백하게 퍼졌다. 특히 얇으면서도 쫄깃한 도우는 그 자체로 인상 깊었다.
하지만 까르보나라는 예상 밖이었다. 입에 넣는 순간 강렬한 짠맛이 확 치고 들어왔고, 크리미할 거라 짐작했던 질감은 의외로 부담스러우리만치 꾸덕꾸덕했다. 그 순간 솔직한 속마음이 스쳤다. ‘역시 내 입엔 한국식 퓨전 파스타가 더 맞는 것 같네.’
덤으로 곁들인 하우스 와인은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잔 단위로 시켰는데 가격은 놀랄 만큼 착했고, 음식과 함께하니 맛이 한층 더 깊어졌다. 역시 스페인,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와인국'이다! 앞으로 이어질 로마의 여정이, 어쩐지 알코올 탐방기로 가득찰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역 앞의 소란스러움을 조금만 벗어나니 풍경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돌바닥 길을 따라 걷다 고개를 들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들어온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건물 하나, 기둥 하나가 모두 오랜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야외 박물관 같았다.
택시 창문 너머로 스쳐 보았을 때는 그저 낯선 풍경에 불과했지만, 직접 발걸음을 옮기며 눈앞에서 하나씩 마주하니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오래된 건축물의 균열, 손때 묻은 돌기둥의 표면, 그리고 그 사이를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까지—현장감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로마는 확실히 걷는 도시였다. 차에선 절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친구와 마주 본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졌다.
“천천히 걸으며 도시 곳곳을 느껴봅시다.”
로마에서의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 이미 답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풍경들에 대한 기대가 한층 더 부풀어 올랐고, 발걸음은 저절로 가벼워졌다. 도시는 어느새,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편, '이탈리아 로마 : 좋던 나쁘던 백문이 불여일견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