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들녘의 바람이 느껴졌다.

by 정원철

철원 들녘의 바람이 느껴졌다.


이사를 온 지 육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서 일부러 예전에 살던 동네를 찾는다. 낯가림이 심하고 사람을 가리는 성격 탓에 새로 이사 온 집 주변의 미용실에 가기를 꺼린 탓이었다. 새로운 미용실에서 낯선 디자이너와의 만남이 싫은 것은 아닌데 기분 좋은 긴장감은 아니다. 내가 새로운 미용실을 꺼리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낯선 미용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찾으시는 디자이너를 물을 때와 만면에 미소를 짓는 스텝들의 환대를 받을때 나는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포대기에 둘러싸여 큰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디자이너가 원하는 스타일을 물을 때에도 난감하다. 머리를 자르는 내내 나를 뚫어지게 보는 디자이너와 우스꽝스럽게 되어버린 내가 거울에 비치는 게 싫어 머리를 자르는 내내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만지면 미용실은 거의 잠자러 온 사람처럼 꾸벅꾸벅 졸아댄다. 이러한 이유 들로 내 머리카락을 10년째 맡기고 있는 디자이너를 찾아 주말에 예전에 살던 동네로 간다.

지금 다니는 미용실의 디자이너를 만나기 전에도 10년 넘게 같은 미용원장님에게 머리카락을 잘랐었다. 그분이 개인 사정으로 미용실을 정리하는 바람에 어느 미용실로 가야 할지 고심했다. 새로운 디자이너와의 만남은 어렵지도 오래도 걸리지 않았다. 무심코 들어간 미용실의 20대의 앳된 새내기 디자이너가 내 머리를 잘랐고 그 이후로 계속 그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잘랐다. 지금은 세월이 지나 강남의 브랜드 미용실의 원장님이 되어 있고 그사이 그녀는 실연도 했고 결혼도 했다. 그 디자이너가 걸어온 길 위에 매달 거의 한 번씩 내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아서 머리를 잘라 주는 익숙하고 편안함을 얻기까지는 세월이 필요하다. 머리 자르는 일은 새로움보다 익숙함이 더욱 편안하다.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요일에 차를 끌고 예전에 살던 동네의 미용실로 향한다. 이제는 미용실의 불편함보다 조금은 기분 좋은 하루를 기대하며 운전하는 수고스러움 정도는 감내한다.


어느 날엔가 평소대로 미용실에 예약을 하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차를 몰았다. 디자이너는 내가 이사를 갔음에도 연을 끊지 않고 찾아온 우리 부부를 살갑게 반겼다. 그날 나를 반기는 얼굴에 약간 피곤함이 비쳤는데 얼마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말하고 곧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혼 안 하고 헤어질 거면 진작 헤어졌어야 하는데 서른다섯에 애인이 없어지니 참 난감해요.” 그녀가 실연했다는 말보다 서른다섯이라는 숫자에 나는 당황했다. “벌써 서른다섯이에요?” 서른다섯이란 말이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녀는 만감이 교차해 보였다. “그러게요. 스물일곱에 선생님을 뵈었는데 어느새 서른다섯이네요.” 애인과 헤어졌다는 그녀의 말보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누르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실연보다 7년이란 세월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먼 하늘에서 찾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때 세월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모르고 찾을 생각도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노련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선생님. 마실 거 드릴까요?” 평소에는 미용실 안에서 커피를 사양을 했는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접시에 커피와 옥수수 하나를 담아왔다. “외할머니가 보내온 거예요.” 머리를 자르려고 한 달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미용실에 가서 그녀에게 머리를 맡겼다. 백 번은 아니어도 거의 그 정도에 가깝게 그녀에게 머리를 잘랐다. 그녀의 외갓집이 철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옥수수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단맛을 냈다. “맛이 어땠어요?” 디자이너가 물었다. “먹는 내내 철원 들녘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숫대가 생각났어요.” 그녀가 깜짝 기뻐하며 말했다. “제 외갓집이 철원인 것도 알고 계셨네요.” 옥수수를 통해 그녀는 철원 외갓집 들녘의 바람이 잠시 상기되었을 것이다. “이번 주에는 할머니 댁에 다녀와야겠어요?” 디자이너가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집 앞 철원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했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 듣는 일은 때로는 피곤하다. 별 관심도 없는 사생활을 주절주절 말하거나 쉬지 않고 자랑까지 늘어놓는 사람은 나를 지치게 한다. 누군가가 그 사람들에게 애정이 없기에 그러는 거란다. 꼭 애정이 있어야 누군가와 사소한 일상을 나누는 일은 아니다. 지나치면 애정마저도 사라지는 법이다. 사소한 일상을 사소하게 나누며 간혹 그 사람에게 철원 들녘을 상기시켜 줄 때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다. 내 일상을 기억해 주고 물어보고 목소리를 들을 일이 거의 사라졌다. 가끔 톡을 보내고 전화는 점점 줄어가고 만나는 일은 고작해야 일 년에 한두 번이다. 매달 만나는 그 헤어디자이너는 매번 내 머리 상태를 점검하고 요즘 스트레스 많은 일이 있는지 묻는다. 때로는 햇볕에 그을린 두피를 보고 운동을 많이 한 것 까지도 짚어낸다. 친구나 가족이 안부를 물어오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안되지만 디자이너의 일상적인 관심에서 어느날은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다.


미용실의 스텝 중 한 분이 내 머리를 감기며 예약 명단에 선생님이 있어서 내심 기다렸다고 말한다. 스무 살을 갓 넘긴 그 스텝은 지방에서 미용전문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매일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어요?”라는 그 스텝의 말에 젊은 날의 고뇌가 다 읽혔다. “모를 때는 알 때까지 그냥 일해봐요.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든 걸 알고 하지 않아요. 그냥 하는 겁니다.” 나도 잘 알지 못하는 말을 내뱉었었다. 그날 무심코 던진 이 말에 그 신입 스텝은 얼마 전 자신의 전용 가위를 샀다고 했다. 나하고 나눈 이야기 때문에 미용 디자이너의 일에 다시 몰입한다고 했다. 내년이면 디자이너 테스트를 볼 계획이라며 내 머리를 평소보다 오래 감기고 있었다. 그 스텝이 자신의 일상 중 하나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기억해 두었다 물어봐 주어야겠다. 우울한 날에 누군가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일상을 물어주면 깜짝 놀라고 다시 밝아지기도 한다. 혹시 그런 날에 철원 들녘의 바람이 그녀에게 다시 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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