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by 정원철

술 이야기

어제 지인을 만나 술을 마셨다. 둘 다 소주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잔에는 소주 나의 잔에는 맥주가 담겼다는 것이다. 나는 ALDH 효소가 거의 없어 술이 몸에서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와 술자리를 오래도록 지속하려면 이런 방법이라도 해야 그나마 술자리를 이어갈 수 있다. 나는 정말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서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이 도태되거나 자칫 장애인 취급마저 받을 수 있다. 술이 주는 사람 간의 소통에서 소외된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서럽다. 인사동에서 홍어 삼합에 막걸리를 맛있게 마시던 지인이 내게 말했다. “형은 술을 못 마시니 인생에서 즐거움 하나를 모르고 사는 거 같아요” 그날 이후 몇 번의 저녁 식사 자리를 끝으로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술은 혼자 아니면 같이 마시는 음료이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과 술을 마실 수 없다. 그래서 연락이 없어진 그를 섭섭해하지 않는다.


술을 못 마시는 나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도 있다. 아내이다. 결혼을 위해 처갓집 가족들에게 인사를 갔다. 아내는 막내였고 위로 처남들과 처형들과 첫 만남이었다. 그때 아내가 술을 마실 줄 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아내와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다. 처남들이 나를 반기며 결혼을 축하한다며 술잔을 권했다. 그때 몹시 긴장한 나머지 술잔을 사양할 수 없어 한 잔을 받아 마셨다.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내는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을 알아채고 오빠들에게 술을 권하지 말라고 했다. 처남들은 아내에게 그럼 네가 네 신랑 몫까지 마시라고 했고 아내는 오빠가 주는 술잔을 나 대신 받아 마셨다. 그날 나는 술 한 잔 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처남의 집에서 자고 아침에 해장국까지 먹고 나왔다. 결혼 초기에 회사의 술자리에서 직장 동료들은 아내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술을 마시면 집으로 전화해 나를 데려가도록 연락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택시를 타고 와서 저녁이 되기도 전에 길거리에 누운 나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갔다. 술 못 마시는 나는 아내에게 죄송하다.


회사를 다니며 회식자리의 술자리는 고역이었다. 직장 상사가 따라주는 술을 일단 속에 넣고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연말 모임이 많아지는 때에 잦아지는 술자리로 몸이 점점 안 좋아졌다. 회사에서 팀장으로 성과를 크게 내었던 해에 그룹의 오너가 준비한 회식자리에 앉았다.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을 안 회장이 술잔을 내게 권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배려이지만 그 자리에서는 소외였다. 정작 성과는 나의 팀이 내고 주변의 사람들이 회장과 잔치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전문경영으로 대표이사에 계시던 사장님이 내 옆자리로 와서 술잔을 내게 주었다. “회장님에게 가서 한 잔 따라드리고 와라. 너도 임원을 하려면 해야 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일 년 후 나는 사표를 내었다. 임원 하려다 제 명에 못 살 거 같았기 때문이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참 서럽다.


오래된 친구와 제주도 트레킹여행을 갔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올레길을 걸으며 중간의 쉼터에서 친구는 제주 감귤 막걸리를 마시며 기분을 만끽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는 술을 한 보따리를 샀다. 낮에 마셨던 막걸리의 여흥을 밤까지 이어가며 하루의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밤에 같이 술 한잔 하는 재미로 같이 여행을 오는 친구를 두고 술 한 잔 마시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내가 잠들었다 잠시 일어나 보니 친구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친구가 물었다. “좀 자니 괜찮냐?” 술만 마시면 잠들어 버리는 나를 수십 년 간 보면서 혼자 밤에 앉아 술을 마시는 친구이다. 이럴 때 술을 못 마시는 나는 친구에게 참 미안하다.

독일의 뮌헨에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뮌헨은 맥주의 본고장이고 그 명성에 걸맞은 맥주 양조장이 많다. 그중 슈나이더 브로이하우스에 가서 맥주를 주문했다. 당연히 안주로 먹음직스러운 소시지도 따라 나왔다. 첫 한 모금이 목을 넘기는 순간 맥주의 청량감이 온몸에 서서히 퍼져갔다. 맥주의 첫 한 모금으로 나는 술을 다 마셨다. 다시 잔을 입에 데었을 때 나의 온몸이 붉게 꽃을 피웠다. 독일 뮌헨에 왜 가냐고 묻는다면 맥주 마시는 재미로 간다. 맥주 양조장으로 유명한 지역에 가서 갖가지 향을 가진 맥주를 맛보며 사람들은 어느 여행지보다 행복해한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뮌헨에서 맥주를 한 모금 밖에 마시지 못한 일이 생각날 때마다 좀 아쉽다. 술을 못 마시는 나는 참 속상하다.

내가 크고 성장하는 동안 부모님 집에서 술자리는 거의 없었다. 직장 생활하며 서서히 익혀가던 술을 어느 날 집에서 혼자 마시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는 일은 내가 자라온 환경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 시간 회사에서 마시던 술에 조금씩 적응이 되었는지 적당히 마시면 속은 울렁거리지도 않았고 블랙아웃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과 술을 마시면 모든 술을 내가 마신 것처럼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도 개의치 않게 되었다. 아내는 차라리 못 마시고 안 마실 때가 나았다며 벌건 얼굴에 술잔을 들이켜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녁 외식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술을 주문하면 아내는 걱정을 넘어 잔소리를 한다. 내가 먹다 남은 술은 모두 아내의 몫이 되는 일이 잦아졌고 못 마시고 남길 술을 주문한다고 나무랐다. 가끔씩 따스한 조명 아래에서 별 시답지 않은 소리에도 웃음이 절로 나오며 누군가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이런 말을 하면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술꾼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던 사람이 하고 있으니 기절할 법도 하다. 술에 적당히는 좀처럼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술을 못 마시는 대신 아주 조금씩 자주 마시는 일이 생겼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맥주나 와인 한 잔 정도의 술은 내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묘약이 되었다. 술과 조금 가까워지니 가족들과의 모임도 즐거워졌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조금씩 자주 마실 때 알코올 중독에 더욱 취약하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와인 한 잔을 비우고 조명이 낮은 거실의 공기를 음악으로 채웠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어느 때인가 혼자서 포장마차에서 잔치국수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엄청 속상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고독한 남자 곁에 혼자서 마시는 소주는 대체 불가한 위로처럼 보였다. 그날 소주 한 잔만 따라 마시고 곧바로 포장마차를 나왔다. 기분이 안 좋았던 일보다 방금 마신 소주가 속을 더욱 괴롭혔다. 술은 적당히를 알지 못한다. 술이 전두엽을 마비시키고 이성의 스위치를 끄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도 술로 인해 조금씩 전두엽의 활동이 위축되어 가고 있다. 술을 절제하려고 달력에 술 마신 날을 기록하기로 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은 기가 막혀한다. 나도 조금 어이가 없는데 그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이해가 된다. 술을 못 마시며 안 마시겠다고 다짐하는 나는 참 황당하다.


술이 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하다. 술은 어느 때는 모두를 행복의 도가니에 한꺼번에 빠뜨린 것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어느 순간에는 무섭게 돌변해 난동을 부리게 한다. 밤거리에서 휘청대는 취객을 보면 술처럼 해로운 음식도 없어 보인다. 내 인생의 화제에 술이라는 음식은 올라올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술을 못 마시는 내가 술을 두고 참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기에는 술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바다의 깊이를 알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소금인형처럼 서로의 핏 속으로 들어온 술로 우리는 마음의 깊이를 나눈다. 술이 남아 있는 동안만 잠시 나누는 마음의 깊이는 술기운이 사라지면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 나는 진지하지만 술이 깨고 나면 허무하다. 지난밤 여과 없이 튀어나온 말들이 다시 생각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술 이야기의 결말을 내야 하는데 도저히 어디에서 끝을 내야 할지 모르겠다. 연애라도 해보고 그 여인의 얼굴이 어떤지 마음이 고운지 왜 만남을 그만두었는지 말이라도 남길 거리가 있을 텐데 장가도 못 간 노총각의 연애담처럼 그냥 휑하다. 이럴 때 술 못 마시며 술 이야기 하는 나는 참 답답하다. 이 답답한 심정을 두고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과 한 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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