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눈과 여린 잎

by 정원철

꽃눈과 여린 잎


4월의 하루는 꽃눈이 내린다. 벚나무의 벚꽃이 활짝 피어 꽃구경 갈 생각에 주말을 기다렸는데 벚꽃은 하루를 기다리지 않고 바람이 불어 꽃이 눈처럼 쏟아져 내린다. 길 위에 꽃인지 눈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벚꽃이 소복이 쌓이고 하얀 색종이 같은 꽃잎이 바람 부는 대로 구르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휩쓸려간다. 어젯밤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황홀하게 피어있던 벚꽃들이 봄바람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진다. 벚나무의 꽃은 지고 그 위로 봄기운에 겨우 눈을 뜬 청단풍 어린잎들은 고사리 같은 손을 펴려고 바들대고 있다. 꽃은 지는데 잎은 이제 움트기 시작한다. 꽃이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동안 여린 잎은 아주 조금씩 여름의 녹음을 만들어 가고 있다. 벤치에 앉아 싱그러운 연둣빛 나뭇잎 사이로 속절없이 지는 꽃을 본다. 눈처럼 내리는 벚꽃 아래에서 눈을 감으니 내 고향의 아름드리 벚나무의 꽃잎이 나에게 쏟아져 내린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군가도(전주와 군산 간 도로) 벚꽃백 리 길’ 중에서도 벚꽃이 가장 탐스럽고 아름다운 구간이었다. 벚꽃이 신작로를 따라 줄지어 있는 길옆으로 폭이 제법 있는 강이 반듯하게 흘렀고 그즈음에 드넓게 펼쳐진 평야도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낮보다 밤에 벚꽃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 더욱 많았는데 아름드리 벚나무의 탐스런 꽃들이 사람의 마음을 밤에 더욱 사로잡았다. 집 옆에 벚꽃 명소가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불편한 일이 더욱 많았다.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벚꽃 구경 나온 차들로 막혔고 조용한 마을이 상춘객으로 가득한 일도 반갑지 않았다. 주말에 논에 농사 준비를 도우러 나가는 길에 벚꽃 구경온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은 더욱 반갑지 않았다. 논이 하필 벚꽃길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핫플레이스 바로 옆에 있었다. 혹여라도 내가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까 얼굴을 가리고 논으로 향했다. 어제는 차를 운전하며 인디밴드 10cm의 노래를 들으며 웃음이 나왔다.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벚꽃이 그렇게도 예쁘디 바보들아 결국 꽃잎은 떨어지지 너네도 떨어져라 몽땅 망해라 망해라’ 그때는 딱 이 마음이었다. 어느 날 봄 비람에 벚꽃이 날리고 봄비에 꽃잎이 씻기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렬로 늘어선 벚꽃들이 개천 위로 흰 꽃잎이 날리는 장관은 잊을 수가 없다. 오히려 상춘객들이 봄꽃의 끝물이라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에 맞추어 집을 나와 강둑 위를 걸었다. 꽃으로 하얗게 뒤덮인 강물을 내려다보며 흰 눈을 쏟아부은 듯한 강물이 강둑 위를 걷는 나보다 더디 흐르기를 바랐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벚꽃길이었다.


꽃이 좋냐 물으면 십 대 일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꽃은 너무 빨리 져버려 허무하다. 많이 좋아하고 정을 주었는데 한 학기도 안 다니고 전학 가버린 친구처럼 서운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화분에 심을 화초를 고를 때에도 꽃이 지고 난 후의 잎 모양을 상상하며 화초를 고른다. 골라서 심다 보니 베란다의 화분들에 심은 화초의 잎들이 제각각이다. 작고 크고 길쭉하고 넓적하고 앙상하고 덥수룩하고 머리털 같고 앙증맞은 잎과 가지를 보고 있으면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아이들 같다. 만병초, 무늬 천리향, 백화등, 섬진달래, 청매화 붓꽃, 미스김 라일락, 무늬 꽃다지, 섬노루귀, 땅콩 사랑초, 아네모네, 초설 마삭, 동백, 아이비 등 이 화분들이 서로 잘난 체하지 않고 베란다에서 햇볕을 사이좋게 나누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흐뭇하다. 화분들에게 겨울은 고난의 시간이다. 겨울을 잘 보내고 꽃을 피운 녀석도 있지만 꽃을 올리지 못하고 말라버린 화분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잎이나 나무의 수형이 좋고 사철 푸른 분재는 베란다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빼어난 수형을 가진 화분은 무슨 변덕인지 반에서 잘 생겼는데 공부도 일등인 친구처럼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수더분한 잎을 가지고 겨우 꽃대 몇 개를 올렸을 뿐인데 자꾸 눈길이 가는 화분이 있다. 올봄에는 대문자초가 꽃대를 올렸다. 꽃이 다 지기 전에 다시 새로운 꽃대를 올리는 우이엽 화분에게는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땅콩 사랑초는 줄기가 가늘어져 머리카락처럼 늘어지도록 일 년 내내 꽃을 피운다. 화려하고 수수한 그 꽃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

겨우내 마른풀로 뒤덮인 자투리 땅에 보라색 제비꽃이 피었다. 박용택 시인의 시구절‘ 작은 등불 하나 제비꽃은 제 가슴에 보랏빛 등불 하나 켜고 가장 먼저 봄을 맞는다’처럼 봄의 전령이 땅에서 봄소식을 실어 나른다. 하루 이틀 지났을까 자고 일어나니 온 세상이 봄을 알리는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꽃에 정신이 팔려 꽃 주위를 떠나지 않고 들뜬 마음으로 봄을 맞는다. 봄꽃은 참 허망하다. 봄꽃의 요란한 잔치는 사람 마음만 미치게 만들고 끝이 난다. 십일 붉은 꽃이 없다더니 십 일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꽃은 진다. 꽃이 진다고 아예 다지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시인이 제 아무리 말해도 꽃이 지면 들떴던 사람의 마음도 가라앉는다. 꽃이 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져 떠나간 자리에 여린 잎은 봄바람을 맞으며 자란다. 눈처럼 내리는 꽃을 맞으며 사람들이 사라진 후 나뭇가지에서 연두색 여린 잎이 조금씩 움트고 있다. 가끔씩 매섭게 구는 봄바람에 바들바들 떨며 조금씩 몸을 키워가는 여린 녀석들은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 힘들어 보이기도 하다. 생명이 성장해 가는 일은 고되지만 아름답다. 버드나무의 실가지가 산에 물감을 칠하듯 연둣빛을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산이 조금씩 연둣빛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제는 신록의 시간이다. 고사리손 같았던 여린 잎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버젓이 손을 펴고 포슬포슬한 잎이 되어 사락사락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듣고 이제 봄은 거침없이 쳐들어올 것이다. 서서히 녹아 촉촉해진 땅이 겨우내 잠자던 나무의 뿌리를 깨운다. 마침 내린 비로 나무의 몸이 젖고 마른 가지 끝에 좁쌀만 한 싱싱함이 물방울처럼 맺힌다. 돌기 같은 새순 끝을 찢고 여린 잎이 나오는 시간을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종기가 부어올라 고름이 터지듯 여린 잎이 새순을 열어젖히는 동안 사람들은 꽃에 정신이 팔려있다. 이제 여린 잎은 출발선을 튀어 나가 신록을 지나 싱그러운 초록의 숲까지 거침없이 밀고 갈 것이다. 꽃이 열어젖힌 문으로 봄이 들어와 산과 들을 신록으로 물들이며 봄은 막을 내린다. 이 기가 막힌 생명의 발랄함에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꽃이 한창인 봄날에 모두가 봄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나무와 풀이 봄을 맞이하는데 봄소식을 듣지 못하고 겨울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사계절을 동시에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봄의 속삭임에 귀가 번쩍하지만 그 누군가는 봄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쩌다 맘 편히 봄을 즐기지 못하게 되었는지 안타깝다. 그게 꼭 사람 성격 탓만도 아니다.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수렁에 빠져있다. 뉴스는 후안무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로 구토가 나온다. 널뛰는 주가를 확인하러 주식 앱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희비를 오락가락한다. 세상의 거대한 이슈부터 사소한 걱정거리까지 사람 사는 세상은 따지고 보면 봄이 왔다고 마냥 꽃놀이 갈 만한 상황이 아니다. 꽃잎 날리는 날에 시집을 꺼내어 시를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꽃그늘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고개 들어 꽃 한번 보고 한숨 한번 짓는 게 일상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하거나 걱정으로 가득해도 봄날은 오고 또 간다. 기약이 있어도 기약이 없어도 봄은 오고 붙잡아도 붙잡지 않아도 봄은 간다. 세상이 부글부글 타오르고 사람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도 봄은 찾아오고 꽃을 피운다. 봄날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 차가운 겨울옷을 두껍게 입은 사람이 있다. 봄날에 꽃이 피건 말건 관심 없이 욕망의 깊이만을 재고 있는 사람이다. 떨어지는 부동산 가격에 몸서리치고 사지 못한 주식에 속이 상해 떨고 있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악마도 친구로 삼고 돈을 잃는 일이면 세상의 정의도 곱게 보지 않는다. 걱정만 쏟아내는 사람과 마주하며 창밖의 꽃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봄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나가고 밖에서 봄꽃이 시들거나 떨어진다. 그러는 사이 봄은 돈이 무슨 소용이냐며 들로 산으로 놀러 간 농땡이 친구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봄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돈도 없고 시간도 부족하다고 울상인 사람은 봄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나뭇잎은 신록을 지나 여름의 녹음으로 커나간다. 봄이 없다거나 짧다고 여긴다면 지금 봄은 누구 차지인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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