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기다리다 드는 생각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말에는 욕망과 인내가 마음 밑부분에 깔려있다. 기다림이 없는 하루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베케트의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은 ‘고도’라는 인물을 50년 동안 기다리며 ‘아무도 오지도, 가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정말 끔찍하다.’고 절망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일은 때로는 잔인하다.
잠시라는 시간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기다림의 시간을 인지하는 사람 간의 차이로 종종 갈등을 빚는다. 아내에게 사과 하나 먹자고 했는데 아내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할 때 나는 앞일이 짐작된다. 잠시 후 나는 사과를 깎고 있게 될 것이다. 배달음식을 시켰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을 때에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만의 전화를 다시 돌린다. ARS 전화를 걸었을 때 상담원이 모두 통화 중이라 잠시 기다려 달라는 멘트가 수화기에서 반복해 나온다. 몇 분 동안 지금은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라는 말만 듣다 그만 전화를 끊는다.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잠시’라는 애매모호한 시간은 사람을 수렁에 빠뜨린다. 잠시 기다리면 될 일을 그걸 못 참고 포기하거나 낭패를 보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지 못한 일을 후회한다. 때때로 잠시라는 두 글자로 인해 사람들은 좌절의 이정표를 지나 '분노'에 이른다. 기다림에 지쳐버린 이들에게 기다림이 미학으로 가는 길은 숭고함 아니면 자기 최면이라도 있어야 가능해 보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는 비가 대지의 생명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해도 목말라 타들어가 죽어가는 생명에게 잠시 기다림은 가혹하다. 기다림은 누군가에게 잔인하고 가혹하다.
기다리는 일이 모두 수렁에 빠질 정도로 잔인하고 가혹한 일 만은 아니다. 기다림을 삶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도 있다. 원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애걸복걸하지 않고 내 안의 욕망이 들어오고 나가는 찰나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기다리는 법을 안다. 인도에서 아그라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를 기다릴 때의 일이다. 밤 10시에 출발할 열차가 다음날 아침이 밝아서야 아그라 역에 도착했다. 처음 1시간은 목을 빼고 기찻길만을 바라보았다. 다음 1시간은 플랫폼에 앉아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다음 1시간은 플랫폼에 드러누웠다. 연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다 보면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내가 안달복달한다고 기차가 오는 일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하고 드러눕는다. 인도의 기차역에는 드러누운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기차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냥 누워있다. 기다리지 않으면 마음에 여유가 찾아든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지 않으니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기다림을 버리는 일이 잘 기다리는 길이다. 하지만, 아는 만큼 사는 일은 더없이 어렵다.
기다림이라는 행위의 대상은 카페의 커피부터 빼앗긴 들의 봄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이다. 기다리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버스가 오기를 몇 분 기다리기도 하고 북녘 고향 땅에 다시 가보기를 평생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
나는 베란다에 놓인 천리향의 꽃망울이 터지기를 기다리며 매일 바라다보고 있다.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기쁨이다. 그 옆 동백이 담긴 화분은 소담한 동백꽃을 매달고 있다. 겨울의 끝에 남은 찬기운을 딛고 꽃을 피워낸 동백에게서 꽃망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베란다 문을 여니 기다리던 천리향이 꽃을 피웠다. 유난히 진한 천리향의 꽃향기가 방안까지 밀려왔다. 그다음 기다림의 주인공은 만리향이다. 아침에 보니 만리향의 꽃망울 끝이 핏물처럼 베어나기 시작했다. 살을 찢듯 틈을 벌린 만리향 꽃은 기다릴 틈을 주지 않는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탐스런 꽃이 팝콘 터지듯 부풀어있다. 주말이면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고 버스 타고 산책길을 찾아가기를 좋아한다. 요즘은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 전광판에 보여준다. 기약이 있는 기다림이 주는 편리함으로 버스 기다리는 일은 좀 싱거워졌다. 그렇다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던 시골 버스정류장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무작정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면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문구보다 언제 올지 기다리는 약간의 긴장이 나을 때가 있다. 소설 ‘어린 왕자’에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구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오히려 황홀할 수도 있다. 무언가를 소소하게 기다리는 시간에서 삶은 숨을 고르고 잠시 쉬어간다.
황지우 시인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해서 시인은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고 선언한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겠다고 나선다. 기다리지 않고 어디에선가 오고 있는 너를 맞이하러 가겠다고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을 따라 길을 나선다.
원작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체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를 보면 기다림에 관한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 글을 모르는 순박한 우체부 마리오는 망명온 시인 네루다와 친구가 되고 시를 알게 된다. 시인 네루다가 망명을 풀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 마리오는 네루다가 자신을 다시 찾아와 주기를 기다린다. 마루다는 네루다가 떠나버린 먼바다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나중에 보여줄 시를 소리로 담는 장면은 많은 울림을 준다. 시칠리아의 파도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서 태동하는 자신의 아기의 심장소리까지 섬에서의 일상을 소리로 담고 시로 만든다. 결국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나지 못하고 죽는다. 실제로도 마리오 역을 맡았던 마시모 트로이시는 이 영화의 배역을 마치기 위해 심장병 수술을 미루고 촬영 종료 후 불과 12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마시모가 네루다를 기다리며 소리를 시로 담는 장면을 연기하며 마시모는 무엇을 느꼈을지 생각해 본다.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두고 마시모는 죽음을 맥없이 기다리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우체부 네루다가 그랬듯이 죽음을 무작정 기다리는 대신 시를 담아내듯 죽음을 맞이하며 영화의 촬영을 마쳤다.
불교의 명상법에 죽음 명상법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명상을 통해 수련함으로써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혐오와 공포의 인식에서 벗어나 삶의 과정으로 전환하도록 이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기다림의 대상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맞이하는 대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봄을 기다린다’와 ‘봄을 맞이한다’를 입으로 말해보면 차이가 느껴진다. 기다리는 마음에는 수동적인 마음이 느껴지는 반면 맞이하는 마음에는 단단한 힘이 있다. 수없이 많은 욕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루어지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사는 삶은 초라하다. 기다림의 굴레에서 벗어나 먼 곳에서 오는 그 사람을 맞이하러 길을 나서야 한다. 봄은 언제고 온다. 봄을 기다린답시고 신발 벗어놓고 먼 산 보는 사람이 있다. 봄을 맞이하는 사람은 신발 고쳐 신고 길로 나선다. 길 위에서 봄을 마주하지 못해도 아직 겨울이면 겨울을 맞이한다. 지금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을 기다리는 지혜가 있다. 아는 만큼 살기가 가장 어렵다. 그렇다 해도 무언가를 기다릴 때마다 맞이하는 마음을 퍼올려야 한다. 맞이하는 마음의 물을 퍼올려 기다리는 마음의 불을 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