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온 지 이년이 다 되어 가는데 머리 자르는 미용실은 여전히 예전 동네로 간다. 미용실의 디자이너는 이십 대 후반에 만났는데 지금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있다. 머리 자르러 차 끌고 예전 동네로 가는 일에 대해 아내와 나는 생각이 달랐다. 결국 아내와 아들은 계속 다니던 예전 동네를 다니기로 하고 나는 집 가까운 미용실로 가기로 했다. 다른 일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데 유독 머리 자르는 일만큼은 그렇지 않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아서 머리를 잘라 주는 익숙하고 편안함을 얻기까지는 세월이 필요하다. 머리 자르는 일은 새로움보다 익숙함이 더욱 편안하다.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도 다시 예전 동네로 머리 자르러 차 끌고 다닌다. 불편함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수고스러움은 감내해야 한다.
미용실에 예약을 하고 예전 동네로 갔다. 미용실에 가면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반기고 내가 나올 때 어떻게 배웅을 받을지 알기에 편한 마음으로 미용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디자이너는 이사를 갔음에도 연을 끊지 않고 찾아온 나를 살갑게 반긴다. 반기는 얼굴에 약간 피곤함이 비쳤는데 얼마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왠지 슬픔이 보이지 않고 대신 화가 좀 느껴졌다. 디자이너가 말했다. “결혼 안 하고 헤어질 거면 진작 헤어졌어야 하는데 서른다섯에 애인이 없어지니 참 난감해요.” 내가 놀라서 대답했다. “벌써 서른다섯이에요?” 서른다섯이란 말이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녀는 만감이 교차해 보였다. “그러게요. 스물일곱에 선생님을 뵈었는데 어느새 서른다섯이네요.” 애인과 헤어졌다는 그녀의 이야기만으로도 우울한데 서른다섯이라는 나이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누르는 게 느껴졌다.
디자이너가 노련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선생님. 마실 거 드릴까요?” 평소에는 미용실 안에서 커피를 사양을 했는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접시에 커피와 옥수수 하나를 담아왔다. “외할머니가 보내온 거예요.” 머리를 자르려고 한 달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미용실에 가서 그녀에게 머리를 맡겼다. 백 번은 아니어도 거의 그 정도에 가깝게 그녀에게 머리를 잘랐다. 그녀의 외갓집이 철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옥수수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단맛을 냈다. “맛이 어땠어요?” 디자이너가 물었다. “먹는 내내 철원 들녘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숫대가 생각났어요.” 그녀가 깜짝 기뻐하며 말했다. “제 외갓집이 철원인 것도 알고 계셨네요.” 옥수수를 통해 그녀는 철원 외갓집 들녘의 바람이 잠시 상기되었을 것이다. 기분 좋아지는 일이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 듣는 일은 때로 피곤하다. 별 관심도 없는데 주절주절 늘어놓는 입을 놓치지 않고 쳐다보는 일은 더욱 곤하다. 그런데, 그중에 내 일상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반갑고 기쁘다. 다른 사람의 일상을 듣고 기억해 주는 일이 관계이다. 묻지 않아도 말하고 기억해주고 물어보며 관심을 표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예전 동네의 미용실로 차를 몰게 한다. 미용실의 스텝 중 한 분이 내 머리를 감기며 예약 명단에 선생님이 있어서 내심 기다렸다고 말한다. 스무 살을 갓 넘긴 그 스텝은 얼마 전 나하고 나눈 이야기 때문에 미용 디자이너의 일에 다시 몰입한다고 했다. 내년이면 디자이너 테스트를 보고 얼마 전 자신의 전용 가위를 샀다고 했다. 그 스텝이 자신의 일상 중 하나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기억해 두었다 물어봐 주어야겠다. 우울한 날에 누군가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일상을 물어주면 깜짝 놀라고 다시 밝아지기도 한다. 혹시 그런 날에 철원 들녘의 바람이 그녀에게 다시 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