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표현하는 형용사는 언제나 부족하다
제주도에 온지 9일 째. 전시 보는것을 좋아해 들어간 모임에서 만난 B에게 연락이 왔다. 딱 한번 만났지만 아빠의 이름과 같아 기억이 남는 그녀였다. 제주에 온다며 가기전에 얼굴 보자며 선뜻 먼저 연락을 줬는데, 그게 참 고마웠다.(낯가림 최고봉인 나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일 이므로.) 모르는 사람들 속에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반가운 일이었다.
약속장소는 애월. 그녀의 숙소 근처의 카페를 가기로했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친구가 가고자하는 동선 끝에 이모집이 있어서 픽업을 부탁했다.(이모는 삼양동에 살고있다.) 서귀포에서 애월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 2시간 30분이 걸린다.(한번 갈아타야한다) 눈을 의심했다. 1시간 30분거리의 성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주도는...진짜 크구나. 오늘은 더 부지런을 떨어야 겠다.
아침8시. 평일이라 학생들과 직장인을 태운 버스가 서귀포시내를 돌아 학교와 직장에 사람들을 내려준다. 제주도민들 틈에 섞여 현지인인척을 해봤는데, 별로 그럴듯 해보이진 않는다. 두리번 거리면서 사진찍는 모습이 딱봐도 관광객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서귀포-애월로 가는 버스는 한라산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광경이 너무 신기했다. 관광버스도 아닌 시내버스가 산속을 관통해서 간다니... 그와중에 가을을 벗고 겨울을 준비하는 한라산 속살의 풍경이 아름답다. 매일 창문밖으로 보던 한라산을 버스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바다만 보다가 보는 산의 풍경은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이 또한 제주의 또다른 매력인가보다.
부지런을 떨었던 덕분에 일찍도착하여 약속장소 근처를 배회하며 구경했다. '내가 애월을 오다니!' 제주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귀가 닳도록 듣던 애월은, 도착한 순간 알았다. 이곳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관광지라는 것을. 입구에서부터 관광상품을 파는곳이며, 음식점이며, 카페며, 볼거리가 많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옛날 GD의 카페와, 드라마를 찍은 장소로 유명했다.) 심지어 배도 탈수 있다. 일명 '투명카약'이라고 불리는 투명한 배들이 오징어 말리듯 널려있는 광경이 신기하다. 오전이라 문이 열려있는 곳이 많지 않았기에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담위에 앉아 바다구경을 했다. 서귀포에서 봤던 바다는 푸르고 깊은 동해바다의 느낌이라면 애월의 바다는 '제주'하면 떠오르는 맑고 푸른 에메랄드빛의 바다이다. 같은 제주에서도 바다의 색이 이렇게나 다르다.
사람없는 관광지에 여유롭게 앉아 있으니, 이런 호사가 또 없다. 무엇보다, 날씨가 감동적이다.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비는 오지않고 봄에서 여름 넘어가는 날씨처럼 더웠다. 제주의 변덕스러움이 모처럼 마음에드는 날씨이다. 잔잔히 일렁이는 바다 위로 빛의 조각들이 내려앉아 유유자적 유영한다. 이 영롱한 유영함을 쫒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본다.
지도에서 알려주는 모립으로 들어가는 길은 꽤 험난했다. 돈까스집으로 연결되는 좁은 돌길을 지나 '이게 길이라고?'싶은 골목을 통해 겨우 문을 찾을 수 있었다. (알고보니 이 곳은 후문이었다.) 다시 정문을 통해 다 왔다는 그녀를 마중갔다. 막 오픈한 가게이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손님들이 몇팀 있었고, 우리는 거리두기를 핑계로 카페 가장 가운데, 카페의 문 앞 제일 큰 테이블 끝자락에 앉았다. 날이 너무 좋은 나머지, 햇빛에 서로의 얼굴이 볼 수가 없었다.(눈을 감았음으로, 하하.) 인생사진을 찍어보겠다며 요리조리 핸드폰의 각도를 열심히 쟤보았지만, 햇빛의 방해로 다 허사였다.
어색할 줄 알았던 그녀와의 만남은 타지에서 만난 탓인지 오십배는 더 반가웠고, 낯을 가릴 시간이 없었다. 분명 그녀의 기분좋은 쾌활한 성격이 한몫 했으리라. 무슨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즐거웠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아까 입구에서 봤던 투명한 배(카약)가 떠올랐다.
" 혹시, 괜찮으면 배 타볼래요? 아까 입구에 보니까 타는곳이 있더라구요!"
" 이렇게 갑자기요? 좋아요! "
조금 머뭇거렸지만, 흔쾌히 좋다고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사실, 그녀가 타지 않는다고 하면 먼저 보내고서 혼자라도 탈 생각 이었지만...(과연?) 처음 타 보는 것이였으므로 선뜻 용기를 낼 순 없었지만, 함께라면 그래도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충동적인 결정은, 마치 고등학교때 야자시간을 몰래 빠져나와 친구들과 빙수를 먹으러 갔던 기분을 들게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이 배를 타는 것은 고리타분한 내 삶에대한 일탈이었다. 짜릿해!
얼마남지 않은 시간에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배를 타기위해 움직였다. 털터러러털털-.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경쾌하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옷과 신발이 젖지 않도록(그래도 젖는다.) 구명조끼와 슬리퍼를 배급받았다. 신이났다. 아마 양말과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갈아신었을때부터 그랬을 것이다.(양말 하나 벗었다고 이렇게 신날일인지!) 맨발로 슬리퍼를 신으니 맨살 위로 바다의 바람이 지나간다. 시원하고 기분좋은 바람이다.
이제껏 제주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지금 이순간을 이야기 할것이다.
차례를 기다려서 올라탄 배 위에 앉아 난생 처음 노를 저었다. 하지만 노를 저어도 앞으로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타는것을 볼 때는 쉬워보였는데...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돌다가 파도에 밀려 돌에 부딪히고, 가드라인 표시를 해놓은 줄에 엉키고, 서로의 노에 부딪히고 아주 모든것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이 엉망진창인 상황속에서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즐거웠다. 즐거음의 수치가 1부터 10까지 있다면, 100만큼 즐거웠다. 노를 잘 젓는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가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노를 젓다가 팔이 아프면 바다가 이끄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그것마저 좋았다.(너무 깊은곳 까지 나가서 좀 무서웠지만) 배가 투명한 탓에 앉은 자리 아래로 바다가, 물결이, 출렁거림이 그대로 보이고 느껴져 바다위에 떠 있는 요상한 기분이다. 누워서 딱 낮잠자면 신선놀음의 완벽한 클리셰가 아닐까. 뻔해도 좋다. 아니, 단순히 '좋다' 라는 말 말고,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이마를 탁 치는, 마음을 울리는, 딱 알맞는 표현을 찾지못해 나의 얕은 언어의 세계를 탓하며, 고르고 고르다 결국 '좋다' 고 마무리 한다. '마음을 표현하는 형용사는 언제나 부족하다' 라는 좋아하는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여러모로 이 상황이 놀랍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 내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사실 가장 놀라운 일은 B와 함께 노를 젓고 있다는 것. 제주도에서, B와 함께, 노를 저을거라는 일은 어느 계획에도 들어있지 않은 일이었다.
어깨를 부딪히는 모든 인연들이 귀한 이유이다. 정말 인생은 놀라운일과 신기한 일의 연속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것 같다. 무슨 인생까지 운운하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지만, 사실인걸.
용기를 내지않고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멋진 일들이 쌓이면서, 용기에 대한 경험치가 쌓인다.
언젠가는 내가 먼저, 선뜻, 움직이는 날이 있지 않을까.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애월카페(모립)-> 투명카약체험-> 신의한모-> 무지개다리-> 삼양해수욕장-> 이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