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한달살기]우당탕탕 제주도 서귀포8일 차

돌체 파 니엔테 (Dolce Far Niente)

by 취미수집가


흐린 날씨로 사라진 한라산


아침에 눈을 뜨니 찬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비가 왔다. 제주에 오고 나서 꼭 일주일이 지났다. 일기를 쓰는 지금 지난주 이 시간 나는 제주에 도착했었다. 시간이 참 빠르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길 생각 없어 오지않는 잠을 기다리는것을 포기하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다운받아놓고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보게 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영화 얘기를 조금 해보자면 주인공 리즈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모든것을 버리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리즈가 한말이 인상적이었다.


옛날 이탈리아에 가난한 남자가 살았는데, 교회 성자상 앞에서 매일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복권에 당첨시켜 주소서"

성자상이 참다못해 사람으로 나타나 고함쳤다.

"인간아, 제발 제발 제발 복권이나 사고 빌어라"


난 준비 완료.

비행기표 세장이 복권이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中>


나 자신을 찾겠다던 리즈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가진 것을 털어 1년의 여행경비와 3장의 비행기 티켓을 마련했다. 리즈에게 3장의 비행기 티켓이 복권이었다면, 나의 복권은 제주도 비행기 티켓이었을까. 함정은 목적도, 계획도 없는 무계획 여행이고 나를 찾기는커녕 매일을 한량처럼 보내는 중이지만... 그래도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가장 큰 용기였다.

리즈는 3장의 복권으로 이탈리아로 가서 마음껏 먹고, 인도로 건너가 기도하면서 마음수련을 하고, 마지막 발리로 가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리즈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울었다가, 웃었다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은 리즈를 보며 함께 기뻐했다. 영화의 모든 대사가 주옥같았다. 모든 대사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영화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잘 놀고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내 인생이 혼란스러웠던 게 아니라 집착 때문에 힘든 거라고, 무너져도 괜찮다고,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된다고. 눈물이 고이다가,흐르다가, 엉엉 울어 버렸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20대도 이렇게 보낼수 없다고, 나를위한 시간을 보내겠다고 뛰쳐나왔는데, 막연히 흐르기만 하는 시간에 어쩔줄 모르고 불안했는데 그 이유가 '집착'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해진 '틀'과 '나이'에 대한 집착, 안정감에 대한 집착,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함에 대한 집착,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 없는 나의 마지막 20대에 대한 집착. 어딘가 고장 나 불량품 같은 기분은 내가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무너지는 중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무너져가는 나를 바라보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리즈의 말처럼 변화가 두렵고, 현상유지 하겠다며 버티다가 끔찍하게 망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찬란했지만 화재와 노략질로 파괴되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는 로마의 아우구스테움 처럼, 나의 모습을,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이 불안함 들은 사라질까? 어쩌면 내가 제주에서 찾고 싶었던 것도 이런 것 일지도 모르겠다.






한껏 울고나니 어느덧 비가 그쳤다. 햇빛이 들어온다. 좋아진 날씨에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숙소 20분 거리에 현상소와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스틸네거티브클럽>을 갈 예정이다.

가족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용하던 필름 카메라는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내 차지가 되었다. 필름이 주는 우연함과, 날것의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 계속 찍던 것이 취미가 되어 제주도까지 가져오게 되었는데, 가져온 4개의 필름 중 일주일 동안 필름 한통을 다 써버린 것이다. 현상소 자체가 희귀한 요즘 혹시나 하고 검색해 봤는데 뜻밖에 숙소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파트 사이의 생뚱맞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귀포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필름을 챙겨 길을 나섰다. (아, 물론 어제 만난 새신발도 잊지 않았다.)



현상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완벽한 공간이었다! 현상소와 함께 있는 라운지 구석구석에 재미있는 콘텐츠들(사진집, 굿즈, 책, 필름 카메라, 작품, 등등)이 많았다. 라운지에서 판매하는 카페 메뉴는 많지 않지만 오름, 바당, 우도 개역(미숫가루), 감귤주스 같은 제주스러운 메뉴이름것들이 귀엽고 반가웠다. 어거지로 붙인 이름이아니라, 원래의 이름인 것 처럼 착 달라붙은 이름 같았다. 구석구석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우리집 앞에 있다면 방안갓이 되었을 곳이다.)

친절한 사장님의 안내에 현상실에 필름을 맡기고 오름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주문하여 라운지에 앉았다. 커피도 커피지만 크림뷔릴레같이 겉면을 그을린 듯 구운 치즈케이크가 정말 맛있었다. 느끼하지 않고, 많이 달지 않고 담백한 취향저격의 케이크였던 것이다. (나중에서야 이 케이크 이름이 '바스크 치즈케이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케이크를 크게 떠서 입안에 한가득 넣고, 목이 막 힐즈음 커피 한 모금으로 내려주는 행복의 맛. 영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먹먹했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문자가 왔다. 현상 스캔이 완료되었다며 메일을 확인 해 보라는 메시지였다. (아니, 원래 현상이 이렇게 빨리 되는 거였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져온 노트북을 켜서 메일함을 확인했다. 결과는?


하하하하. 이럴 줄 알았다. 아무래도 더 잘 찍고 싶으면 카메라를 바꿔야 할 것 같다. 기술이 없다면 장비빨(?)이라도 내세워야지. 뭘 찍으려고 한 것인지, 초점은 다 어디로 갔으며, 빛은 왜 이렇게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지. 구도도 하나같이 다 이상하다.(셔터를 누를때 까지는 괜찮았는데...) 포토샵으로 보정하면 좀 나아질까 싶다. 36장을 찍었지만, 건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3장뿐이다. 그 3장 때문에 카메라에 자꾸 손이 간다.



<제주도 망한 사진 모음집>을 주제로 사진을 모아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기대했던 사진이 망한것이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지난 일주일이 필름이 되어 지나간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불안하다' '외롭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심지어 방금 전 까지도!) 사진을 보고 느껴지는 감정과 기억은 '즐거움', '행복' 뿐이었다. 불안하고 조급했던 감정이 한 톨도 떠오르지 않음에 놀라웠다. 아, 불안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거구나. 어쩌면 반대되는 두 가지의 감정은 늘, 함께 공존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것이 당연한것인데 내가 잊고 있었던 걸지도. 중요한 것은 '나'였다. 내가 어떤 감정에 동요되고 매몰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었던 것이었다. 빨간 머리 앤이 오늘의 기분을 '행복'으로 정했듯이, 그 선택한 기분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마음 한켠에 불안한 마음이 있었어도, 남는것이 즐거움 이라면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흘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아, 불안아 또왔니? 음... 너무 시끄럽게만 하지말고 편히 있어, 나갈 땐 저쪽으로 나가면돼. '


다 버리고 떠날 용기만 있다면, 안락함도, 집착도 뒤로한 채 몸과 마음이 원하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면, 그 여행의 순간마다 새로운 걸 배우고 어깨를 부딪힌 모두가 삶의 스승임을 안다면, 아픔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다면, 진실은 당신은 비켜갈 수 없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中>


그랬다. 결국 나를 피하지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마주 봐야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 주말에 잠깐, 짧게 쉴 때는 몰랐다. 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려놓을 용기, 나를 마주 볼 용기, 감정에 매몰되지 않을 용기. 경험치가 부족한 새가슴인 나는, 아직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 뿐.

그때까지, 돌체 파 니엔테 (Dolce Far Niente). 이 달콤한 게으름을 마음껏 즐기자.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숙소(호텔케니서귀포)에서 영화보기-> 스틸네거티브클럽

*디자인프레스에서 인터뷰한 스틸네거티브클럽의 인터뷰이를 꼭 한번 읽어보시길. 스틸네거티브클럽을 애정 하게 될 것입니다.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2107472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