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한달살기] 우당탕탕 제주도 서귀포 7일 차

여행의 경험치. 고민보다 Go

by 취미수집가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한라산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흐린날이 되겠군.

오늘은 고흐와 고갱의 전시를 하고있는 <빛의벙커>에 간다. 지난 노르딕워킹 프로그램에서 알게 된 지수를 따라 도슨트 투어를 신청했는데, 기대도 되었지만 1시간이 넘는 거리에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바로 전날인 어제 신청했기 때문에 사실 귀찮음이 더 컸다.(아무튼, 이 귀찮음과 게으름을 이기고 간 것에 박수!) 성산까지 또 1시간 30분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므로, 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버스가 너무 빨리 와서 눈앞에서 놓쳐버렸고... 떠나는 버스 안의 승객과 눈이 마주친 것은 당혹감 그 자체. 다행인 것은 201번 버스의 배차간격이 많아서 10여분을 기다려 다음 차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된 버스여행. 동백은 지난번보다 더 많이 피어 붉게 물들었고, 수확한 귤나무의 귤은 반쯤 사라졌다. 흐린 날씨로 반짝이는 윤슬은 없었지만, 이 버스가 아니었다면 표선해수욕장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을 것이다.(다음에는 표선에서 물 멍을 해야지!) 이렇게 풍경을 보고 있다 보면, 금세 목적지에 도착한다. 정말이지, 같은 지역 안에서 82개의 정류장을 1시간 반 동안 이동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버스에 내려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도가 참 잘 되어있으므로, 나만 잘하면 된다. 옛날에는 어떻게 종이지도를 가지고 길을찾았는지 새삼 신기할 따름이다. 서귀포에서 흐린 날씨는 성산에 오니 해가 나면서 맑아졌다. 같은 제주에서도 날씨는 참 제각각이다.


어딜가나 있는 제주의 귤나무들

겨울 제주의 길은 오히려 다른 계절보다 더 생동감이 넘친다. 가는 길목마다 귤 농장 과수원이 길 양쪽에 펼쳐져있고,(역시 탐라국!) 멀리서 보면 노란 금잔화 같다. 귤은 색이며, 이름이며 왜 이렇게 귀여운 것인가. 어쩜 이름도 '귤' 인가. 초록 초록하고 주황 주황 한 귤나무들이 사랑스럽다. 재주소년의 <귤>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귤뿐만이 아니라 유채꽃과 동백꽃도 야금야금 피고 있다. '겨울이 오고 있구나', 계절의 흐름을 자연을 보며 체감한다. 어쩐지 올해는 좀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걷는 걸음에 있는 나무, 하늘, 꽃, 풀들이 예뻐 멈추고 사진을 찍다 보니 20분 걸려서 갈 길을 4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투어 시작전 먼저 도착한 지수와 어색하고 반갑게 대화를 나눴는데, 알고 보니 세상에! 그녀와 나는 92년생. 원숭이띠로 동갑이었다! 제주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동갑인 친구라니! 진작에 물어볼걸! 시간이 많은 나와는 다르게, 지수는 내일 제주를 떠난다. 아쉽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호들갑을 떨면서, 더 적극적으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어쩌면 당연히, 원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어쩐지 말이 잘 통하더라니!) 지수는 어제 한라산을 다녀왔던 일, 캠프에서 불멍을 했던 일, 불멍 했던 사람들과 친해져 펍에 다녀왔던 일, 아침에 올레길을 다녀온 일 등을 얘기해 주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설레고 꿈꾸게 된다. 상상하게 만든다. 무계획인 나와는 다르게 시간을 촘촘하고 잘 쓰는 지수를 보면서, '이것이 여행을 많한 사람의 경험치인가.?'언젠가 나도 한라산을, 물 멍 말고 불멍을, 새로운 친구를 또 만나 보리라. 그런데 너, 하루만에 그걸 다 했다고? 정말 체력이 대단하다!


어디서 인가 해바라기 꽃을 든 사람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지수였다. 투어를 진행 해 주실 가이드님이었다. (찾기 힘들까 봐 해바라기 꽃을 들고 다니신다고 한다.) 꽃을 들고 다니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하셨지만, 확실히 가이드님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흐와 고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다는 화가. 나 또한 빈센트와 그의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 그림 위의 화려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작품에 비해 그의 삶은 너무도 어두웠지만, 그가 남기고 간 것은 무용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 같은 긍정으로 가득 찬 무언가였다. 그가 동생인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는 그림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빈센트가 목사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인이어를 통해 듣는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버렸다. 도슨트를 듣지 않았더라면, 인스타그램용 사진만 왕창 찍다가 돌아갔을 텐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맞는 말도 없을 것이다. 웃겼던 것은 영상이 바뀔 때마다 가이드님이 사진을 어떻게 찍으면 좋다고 코치를 해주셨는데, 센스가 아주 넘친다. 투어 신청하길 잘했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시간이 참 바보 같다. 오길 참 잘했다.






전시를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버스 타는 위치가 애매하여, 지수와 함께 택시를 타고 캠프로 이동을 하기로 했다. 한번 가본 익숙한 길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 택시 기사님은 심심하셨는지, 여행객들에게 건네는 으례적인 인사였는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제주 여행은 어땠어요?"

"너무 좋아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하하하. 많이 즐거우셨나 봐요, 원래 즐겁다 생각하면 시간이 빠르게 가고, 괴로우면 시간이 느리게 가는 법이죠."


형식적인 질문에, 형식적인 무미건조한 대답이었는데 기사님의 대답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띵-'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나 지금 정말 진심으로 즐기고 있구나,'

마음 한쪽 구석에 내가 이 호사를 누려도 되는가에 대한 불안, 걱정, 외로움 같은것들 때문에 스스로 눌러놓은 감정의 스위치를 기사님이 켜 주신 것이다. 지금 나의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끼고 있다면,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어차피 즐길 거 힘 빼고 마음 졸이지 말고 그냥 좀 즐겨보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류장으로 이동하기 전 캠프 내에 있는 편집숍에 방문했다. 지난번 왔을 때 신어봤던 신발이 눈에 자꾸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예쁘지만, 이 신발의 포인트는 아웃솔인 등고선 모양의 신발 밑창이다. 걸을 때마다 남는 발자국의 흔적이 예뻐서 신발을 신고 벗고를 몇 차례, 살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지수에게 물어보았다.



" 이 신발... 갖고 싶은데 고민이야. 신발을 이미 세켤레 나가지고 와서 짐이 될 것 같거든... 너라면 어떨 것 같아?"

" 음... 나라면 살 것 같아. 나는 여행 가면 향수를 사는데, 그 향수를 뿌리고 다니면 그때의 기분이 나거든. 나는 이제 집으로 가지만 앞으로 제주에 있는다면, 그동안 이 신발을 사서 여행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

"....?! 사야겠다.(영업 좀 잘하는데..?)"


지수가 해준 이 한마디가. 많은 의미로 다가왔다. 이렇게 명쾌한 이유와 살 수밖에 없는 답이 또 있을까?


"발걸음은 흔적을 남깁니다. 좋은 흔적을 남기며 함께 걷고자 합니다."

<마더그라운드>


앞으로의 발걸음에 좋은 흔적과 만남이 있기를. 앞으로의 제주를 잘 부탁해!

오늘의 긴 하루 끝에 남는 것은 앞으로 갈까, 말까의 망설임에서의 선택은. 늘. 망설이지 말고 가볼 것.

안 갔더라면 몰랐을 이야기들과, 이어지지 않았을 인연, 만나지 못했을 물건들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제주커피박물관-> 빛의 벙커-> 플레이스캠프제주(페이보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