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한달살기]우당탕탕 제주도 서귀포12일 차

여행할 땐,책

by 취미수집가

하루 쉬었다고 몸의 컨디션이 좋아졌다.(내 체력 아직 죽지 않았다!) 이제 서귀포에 남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은 가보고 싶은 곳을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어제 비가 왔으니, 오늘은 날씨가 좋겠지!(비 온 뒤에는 항상 맑으니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제주에 오면 꼭 와보고 싶었던 카페인 <사계 생활>과 동네책방 <어떤 바람>을 가보기로 했다.



사계 생활은 농협은행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이색적인 공간의 카페이다. 은행으로 사용했던 공간을 리모델링하지 않고 대부분을 그대로 남겨둔것이 이 카페의 매력포인트! 접수창구에서 주문을 하면 주문과 동시에 접수번호 번호표를 주는데, 그 은행같은 디테일한 윗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의 접수번호는 58번, 대기인원은 1명이다. 오전시간 임에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구나 하고 짐작해 본다. 메뉴가 나오면 상담창구의 번호판에 접수번호가 뜨면서 픽업이 가능하다. 대기인원이 없는 덕분에 자리를 잡자마자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자리에 앉아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금고는 기획 전시공간으로 사용되어 때마다 전시의 내용이 바뀌는 듯 하고, 지점장실은 사계 생활공간 중에 몇 없는 프라이빗 한 독채 공간이라 경쟁이 아주 아주 치열하다.(공간에 있는 동안 비어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제일 안쪽에는 의류부터 잡지, 책, 포스터, 엽서, 소품 등 공장에서 막 찍어낸 듯한 기념품이 아닌, 제주스러운 물건들이 진열되어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콘텐츠 저장소' 라는 말이 참 적절하다.

콘셉트에 충실한 공간도 멋지지만 '사계 생활'이라는 이름이 참 예쁘다. 처음엔 제주도의 계절이 담겨있는 이름인 줄 알았지만 이 동네에 오고 나서 알았다. '사계'가 '계절'의 사계가 아닌 동네 이름인 '사계리'에서의 사계 생활이라는 것! 중의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재미있고 멋진 공간이다. 제주도는 어쩜 동네 이름조차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걸까.





궁금했던 또 다른 공간. 독립서점 <어떤 바람>은 사계 생활과 서른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 해 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평소에 서점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심지어 이동 동선 가까운 곳에 있으니 완전 땡큐! 책방 이름도 너무 제주스럽고 따뜻하다.(제주의 바람은 절대 따뜻하지 않지만...) 방문 목표는 책 한 권을 '꼭' 구입하는 것. 나는 책이 필요했다. 여행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이 남는 어떻게 시간을 채울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책이었다. E-Book이 넘쳐나는 시대에 굳이 종이책을 읽어야 하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종이 책을 넘길 때 비로소 책 읽는 기분이 난다. 정갈히 놓여있는 텍스트를 따라 성큼성큼 움직이는 눈, 손에 잡히는 적당한 그립감, 종이 냄새, 한 장 한 장 종이장을 넘기는 동작과 사각거리는 소리, 읽어야 하는 분량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눈대중으로 살펴보는 일들은 종이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좋다. 그러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되새기고 아끼는 문장이 늘어가면 책을 향한 애정도 깊어져 간다. 옆에 말 한마디 할 사람 없어도,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닌 기분이다. 어쩌면, 이 여행에서 친구가 되어줄 책을 찾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들어간 책방에서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꽂힌 초록색 표지의 책이 있었으니, 책을 들어 프롤로그만 읽었는데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들어왔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기에. 책도, 여행도 더 넓은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다.

<김남희. 여행할 땐, 책>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책이다. 서점의 모든 책을 눈으로 훑고 펼쳐보았지만 이 책만큼 마음에 들어온 책은 없었다. 아마 상당한 여행의 내공을 가지고 지금 내가 앓고 있는 감정을 감기처럼 앓고 견뎌낸, 면역력 강한 작가임이 틀림없다. 이 책이면 나는 앉아서 세계여행은 물론이고, 나의 감정들을 잔잔히 잠재울 수 있으리라. 오밀조밀 주인장의 손때 묻은 책방을 구경하다 책만 구매해서 나가기 아까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다란 창밖으로 담장이 덩굴이 보이는 다락방 같은 자리에 앉아 고른 책을 읽으며 연신 밑줄을 치다가, 내가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우리가 서점에 가는 이유도 이 넓은 지구에서 내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서점은 섬처럼 외따로 떨어진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김남희. 여행할 땐, 책 137p>


지금 여행 중이 아니었다면, 이 글에 몰입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흘려보냈을 수도 있다. 직접 온몸으로 겪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글로 엮을 수 있는 문장들을 읽으니 든든한 인생 선배님, 여행 메이트가 생긴 것 같다. 같은 생각, 같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위로와 안도감이 몰려온다. 막연하게 떠다니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잘 찾은 표현들로 다듬어진 문장을 만나는 것은, 묵은 체증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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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실내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와 제주도의 흐린 날씨를 온몸으로 맞이했다. 흐린 것은 둘째치고 바람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분다. 그렇지만 사계의 해변을 보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제주가, 사계의 해변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바다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은 금물. 하늘 아래 같은 바다 없다는 놀라운 말을 매번 체험한다.

바람이 모이는 골목을 뚫고 실물로 마주한 사계 해변 역시나 이제껏 봤던 바다와는 달랐다. 듬직한 산방산 앞으로 펼쳐진 넓은 바다와 몰아치는 바람에 거칠어진 파도가 멋있다. 특이한 것은 모래가 바다 쪽으로 갈수록 짙은 흑색이라는 것이다. 검은 모래는 삼양해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삼양의 모래보다 더 검은빛이 났다. 또, 신기하고 아름다운 색의 크고 작은 돌맹이와 조개껍데기가 올망졸망 모여있는 것이 귀여웠다. 산방산 너머로는 맑은 하늘이 보이는데 이곳에만 가득 낀 먹구름과 바람이 애석할 뿐이다. 용머리해안도 가보고 싶었지만, 날 좋은 날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한번 오리라 다짐하며, 안녕.


30분 남짓 남은 버스시간을 어찌 보낼까 하다가 눈에 보이는 식당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제주도 바람에게 때려 맞은 덕분에 추운 몸을 녹일 뜨끈한 국물이 있는 전복 칼국수 집이었는데, 세상에! 제주에 와서 제일 맛있게 먹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은다면 주저 없이 이 칼국수를 얘기할 것이다. 쫄깃하고 실한 전복과, 고소하고 걸쭉한 미역 국물, 쫀득하고 탱탱한 면발을 한 젓가락을 뜨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먹었다'가 아닌 '흡입했다' '마셨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오직 먹기에만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밥도 말아먹고 나왔을 텐데. (알고 보니 꽤 유명한 맛집이라고...) 아... 오늘은 우연에서 온 모든 선택들이 성공적인 하루였다.


숙소로 돌아와서 마지막 맥주와, 정류장 앞에서 산 풀빵과 귤을 먹으며 책을 읽고 일기를 쓴다.

아-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행복을 곱씹는 하루의 완벽한 마무리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사계생활-> 어떤바람-> 사계해변-> 선채향(전복칼국수) -> 유루유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