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스물아홉에서 정지할거야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비가 온다. 비 소식이 차일피일 미뤄지더니, 오늘 내리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이틀 동안 좀 돌아다녔다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 같다. 일밖에 모르던 몸뚱이는 제대로 놀지도 못한다. 놀아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날씨를 핑계 삼아 숙소에서 하루 종일 쉬기로 했다.
오전 내내 밀린 일기를 쓰고, 어제 찍은 사진과 영상들을 들여다보면서 실실 웃다가, 배고파서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시계를 봤더니 2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숙소 근처의 한식당에서 집밥 같은 밥을 먹고 싶었으나, 2인분부터 먹을 수 있다는 얘기에 전화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서럽다.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맛보고 싶은 메뉴는 왜 다 2인 이상일까. 누구 나랑 밥 먹어 줄 사람?(혼잣말이 왜 느는지 알겠다.) 2인분을 시켜서 다 먹을까 싶다가, 한식 2인분... 은 아닌 것 같아 체념하고 다른 메뉴를 탐색한다. 문득. 갑자기. 운명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가는 메뉴가 떠올랐다. 시장과 숙소를 오가는 길 눈여겨봤던 닭 수제비. ' 오늘 점심은 너다! 비 오는 날은 역시 수제 비지!~'
이제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수제비의 쫀득하고 찰진 식감과 걸쭉하면서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에 속이 풀렸다. 차가웠던 몸이 녹고 열기가 돈다. 후식으로는 지난번에 먹었던 크로켓을 먹으려다가 한치빵(오징어 모양의 빵 안에 치즈가 들어있다.)으로 종목을 변경. 나의 입맛에는 안 맞았지만 한 번쯤 경험 해 볼만한, 관광지의 맛이랄까. 숙소로 돌아가기 전 근처 편의점에서 영화 보면서 먹을 주전부리들과 필요한 리스트들을 구입하여 집으로 왔다.(세상에! 집이라고 표현하다니.) 11일 정도 있으니, 이 공간도 제법 익숙해졌나 보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영화 볼 준비를 했다. 침대 헤드에 베개를 세워놓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뒤척이며 몸을 세팅한다. 이불을 덮고, 쭉 뻗은 다리 위로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손 닿을 거리에 있는 귤과 주전부리까지. 아, 시원한 맥주도 잊지 않았다. 준비 완료!
넷플릭스의 수많은 영화들 중 보고 싶은 영화들을 찾다가, 결국. 오늘도. 찜해놓고 봐야지 봐야지 미뤄둔 영화를 뒤적거렸다. 마침 한국에서 리메이크되어 나온다는 소식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선택한 영화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영화는 필름 사진 속 추억을 회상하며 정해진 결말을 잔잔하게 읊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로맨스로 분류되어 있지만, 핑크빛이 가득하고 설탕 냄새가 폴폴 나는 달달하고 꿀 떨어지는 사랑보다는, 우정, 사랑, 미련, 연민이 뒤섞인 '사람'에 대한 정(情)의 느낌이랄까. '헤어짐'의 끝이 있는 결말 속에 덤덤한 이별이 슬프지 않았던 영화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스스로 어항 밖을 나올 수 있게 된 조제의 성장이 기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블로그에서 리뷰한 글을 읽은, '남녀 간의 사랑인, 'LOVE'의 관점보다는 인간에 대한 '愛'의 관점으로 보인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좋았던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볼 때마다 새로운 기분으로 보게 될 영화라는 것을. 서랍 속에 아껴서 넣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영화였다.
너무 몰입해서 본 덕분일까, 금방 끝나버린 영화가 아쉬워 한편을 더 보기로 했다. (연속 두 편의 영화를 볼 텐션이라니! 아직 늙지 않았어!) 그렇게 고른 두 번째 영화는 <나의 서른에게>. 감독이자 배우인 팽수혜가 본인이 10년 넘게 공연해온 일인극 <29+1>이라는 연극을 리메이크해서 만든 영화라고 한다. 영화 제목부터, 딱 느낌이 오지 않는가. 계란 한 판 나이를 채울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는, 별수 없이 끌릴 수밖에 없는 영화 제목이었다. 제목부터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펑펑 울었다. 왜 다 하나같이 내 얘기 같고, 어쩜 그리 내 마음을 잘 아는지. 원래 여행 와서 보는 영화들은 다 말을 거나요? 제주도의 마법인가요? 어쩐지 닮은 점이 많은 영화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제주여행을 결심한 잊고 있었던 계기까지도 닮아 놀라웠다.
"지금까지 난 내가 독립심이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회사까지 그만두고 보니 내가 얼마나 의존적인 사람인지 알게 됐다. 평소에는 일에 의존했고 퇴근 후엔 남자 친구에게 의존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잠에 의존했다 사람이 할 일이 없어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의 서른에게中 >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딱 이런 마음이었다. 스스로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와서 누구의 간섭 없이 홀로 24시간을 몽땅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의존적인 사람이었던가. 일에 의존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가족, 친구, 드라마, 취미라고 불리는 것들에게 의지하여 나의 시간을 지탱하고 있었다. 늘 손닿을 거리에 있던, 나를 채우고 있던 것들이 곁에 없는 지금.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덜어내고, 빼고나니 본래의 나는 바람이 다 빠져버린 쪼그라든 풍선같다. 정말이지 나는 혼자 가만히 있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삼 나의 시간을 채워주고 있는 것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가족의 안부 전화, 보고싶은 친구와의 만남, 애정하는 가수의 음악, 또 방문하고싶은 식당, 두번봐도 질리지 않는 영화, 좋은 문장으로 밑줄이 가득한 책,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록하는 일기장 같은 것들.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채우고 채워준다. 나는 평생 이런것들에 의존해 기대어 살고싶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또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 나를위해 시간을 채우는 일은 나를 더 사랑하는 일이 될까? 잘 모르겠지만 오늘 내가 영화로 채운 하루의 시간은 행복하다? 라는 표현도 꽤 어울리는 하루였던 것 같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나니까. 남은 시간이 얼마든 하고싶은 일을 하고, 가고싶은 곳을 가면 되는거야. 가장 중요한건.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는거지." <나의 서른에게中 >
그래, 그냥 좋으면 좋은거지. 그저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기억하고, 집중 해 보는거지.
홀로 시간을 채워보면서 이렇게 나를 알아간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조방수제비-> 서귀포 올레시장-> 숙소에서 영화보기(호텔케니서귀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