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
1.
2020.11.22일. 오늘의 날짜는 연속적인 숫자로 가득한 날이다. 벌써 제주에 온 지 2주가 되었고, 내일이 벌써 서귀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첫 번째 주는 시간이 참 안 갔는데, 둘째 주부터는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갔다. 그만큼 이곳에 익숙 해 졌나 보다. 많이 안 돌아다닌 것 같은데, 많이 돌아다닌 것 같기도 하고, 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꽉 찬 사진첩과 일기를 뒤적거려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희안하다. 그래도 이곳이 아쉬운 것을 보니 이곳의 생활이 즐거웠던 것은 맞는가 보다.
내일이 이곳에서 오롯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싱숭생숭하구먼.
2.
오늘은 밥 먹을 때 말고는 숙소에서만 있었다. 어제 과소비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까...? 인터넷 쇼핑을 할 때 3만 원짜리 원피스는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며칠을 고민하지만, 치킨은 아무렇지 않게 소비한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나는 매일 치킨을 먹듯 돈을 쓴다. 매달 통장에 꽂히는 돈 없이, 벌어둔 돈에서 야금야금 써 버린 것이 이제 앞 자릿수가 바뀌기 직전이나. 속이 쓰리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는 일단 숨 쉬는 것부터 돈이 든다. 밖으로 나가면? 더 많이 든다. 관광지라 물가가 착하지 않은 데다가, 일단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는데 최소비용이 만원이다. '제주도까지 왔는데!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하면? 두배, 세배가 된다.(눈물) 여행을 하다가 무언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서 구입하면?(어제 같은 상황이랄까...?) 하루에 몇십만 원을 써버리는 것이다. 물론 먹고, 마시고, 놀러 왔다고 하지만, 그것을 매일. 마음껏. 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기에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아. 저렴한 것이 하나 있다. 삼다수! 삼다수의 고장답게 육지에 있을 때 편의점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던 삼다수가, 이곳에서는 500원 남짓. 마트를 가면 300원까지도 한다. 어찌 되었든 소비를 자제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이라는 이상한 결론으로 어제의 과소비를 반성 중이다.(흑흑흑)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것은 아니다.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릴 수 있는 특권이 생긴 것일 뿐!
어제 라바 북스에서 구입한 책과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숙소 문제도 해결했다!(뿌듯!). 처음에 3군데의 동네에서 머물 예정이었으나, 2군데만 정하고 왔는데 마지막 3번째 머물 동네와 숙소를 찾은 것이다. 여행의 종착지는 애월이 될 것이다. 애월에 아주 멋진 숙소를 찾았다.(생각해보니 방구석에서 어제만큼의 소비를 해버렸네...?) 빨리 가보고 싶다.
3.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기에 책도, 여행도 더 넓은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다. <김남희-여행할 땐, 책 >
'어떤 바람'에서 구입한 책의 책을 여는 말이다. 이 문장에 흠뻑 빠져버려 읽기 시작한 책은 침대 위에서의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그리스의 가장 조용한 섬에서 경계심 없는 고양이들과 놀다가, 산티아고의 순례자 길에서는 순례자들과의 대화도 엿들었다. 리스본의 길을 걷고, 미술관 뺨치는 러시아의 격조 있는 도서관과 지하철역을 넋 놓고 상상했다. 근사한 여행이었다. 제주도에 있으면서 굳이 다른 나라 여행을 갈 필요가 없다고 느꼈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들을 상상하며, 언젠가 이 곳의 장면들을 눈 안에 선명히 담고 싶다.
4.
숙소를 내 집처럼 여기는 방법에 대해, 엽서나 그림을 벽에 붙여놓으면, '내방'같아진다는 말에 엽서와 사진들을 붙여놓았다. 꽤 그럴싸하다. 진작에 이렇게 붙여놓았더라면 좀 더 내 집처럼 애착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일기에 제일 많이 등장한 단어를 꼽자면, 아마 '외로움' 이 아닐까. 살면서 이렇게 고독스럽게 나를 마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낯선 당혹감을 대체할 단어가 '외로움' 뿐이었다. 그 낯선 감정을 마주하기 겁나서 나를 열심히 움직였다. 길을 걷고, 맛있는 것을 먹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고 이런 것들에 의지해 시간의 공백을 메웠다. 그러다 책의 한 문장이 나를 관통했다.
개인적인 행복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철저히 관계 속에 존재해요.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 자연과 맺는 관계, 이웃과 맺는 관계의 고리들... <김남희-여행할 땐, 책 p.63>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혼자 있고 싶어 하다가도 뒤돌아서는 온갖 고독이 몰려왔다. 하지만 결국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던 시간들 중에 온전히 '혼자' 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늘 나와 함께였다. 나는 나를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음에 균열이 생길 때마다 밖으로 나갔고, 맛있는 것을 먹였고, 책이나 영화, 친구와의 연락, 사진, 물건, 나를 구원할 무언가를 끌어다 나를 다독여 줬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나 자신과 엮여있는 무수한 관계의 고리들로 인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나 스스로와 있는 시간이 좋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내 마음을 제일 잘 이해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제일 잘 알고, 싫은 것도 잘 알고, 같은 취향을 갖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하고, 같이 울고 웃는 '내편'인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뭐지 이거, 혹시 자아도취? 나르시시즘? 정신승리?)
와, 정말 이 낯선 곳에서 나를 제일 많이 생각해주는 사람은 나였구나... 고맙다. 나 자신. 날 놓지 않아줘서.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숙소에서 놀기(호텔케니서귀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