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별책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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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다는 계획을 언제 했냐는 듯이 가볍게 무시하고 9시에 눈을 떴다. 호텔 침구가 좋기는 한가보다. 잠깐 눈감으면 30분, 1시간이 훌쩍 지나서 방심하다가는 반나절을 침대와 함께 보내게 된다. 물론 그것도 너무 행복한 일이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서귀포에서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원래 오늘 다음 숙소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숙소 예약 날짜를 잘못해서 연장하게 된... 책의 부록 같은 날이다.(하하하, 친구들이 알면 또 한소리 하겠지?^^)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요즘 사부작사부작 피기 시작한 동백꽃을 만끽하기 위해 위미의 동백수목원과, 근처 카페, 그리고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현상소를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탈 때마다 매번 지나쳤던 수목원의 동백이 더 만개하고 있었다. (아니, 육지에서는 패딩 입고 다니는 11월인데! 이래도 되는 거야?)
이곳은 작년 1월에 고등학교 친구인 마늘과 함께 왔던 곳이다. 고2때 만나 같은 입시미술 학원을 다니면서 친해졌는데, 덜렁대는 나와는 다르게 똑 부러지고 대쪽 같은 친구여서 배울 점이 많고 11년을 함께해준 참 고마운 친구이다. 친구와 함께왔던 곳을 혼자 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기억했던것 보다 많은것이 바뀌어 있었다. 본격적인 매표소가 생겼고, 표 검수하는직원과화장실도 생겼다! 입장료는 올랐지만, 쾌적해진 시스템이 만족스러웠다.
수목원은 커플들과 친구들,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고, 당연하지만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머쓱)
열심히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 못지않게 홀로 삼각대와 고분 고투하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삼각대...! 내가 오늘을 위해 이걸 샀구나!?' 그리고 처음 알았다. 내가 이렇게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혼자 사진을 찍는 것이 좀 안쓰러워 보일 줄 알았는데, 찍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 겨를 없이 재미있었다. 심지어 좋았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지 몰라 고장 난 로봇이 되어버리는데, 혼자 찍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고 싶은 만큼 찍을 수 있었다. 평소에 할 수 없던 예쁜 척(?)은 기본값이고, 웃기고 과감한 포즈를 지으며 무려 한 시간 가량을 찍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천장은 찍은 것 같다.(물론! 그중 건진 사진은 몇 장 없지만...) 한참을 찍다가 '혼자 사진을 이렇게까지 찍을 일인가?'라고 현타가 왔다가, '혼자서 이렇게까지 놀 수 있구나? 할 거 다 하고 잘 노는구나!?'라고 감탄스러웠다. 낯짝이 두꺼워진 것 같은 기분인데 뿌듯한 것은 왜일까.
잘 놀았겠다, 슬슬 당 떨어짐이 느껴져 어제 봐 두었던 근처 카페를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수목원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여서 또 걸어가기로 했다. 사람이 걷기에는 도로와 너무 가까워 조금 위험해 보였지만,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여서 괜찮았다. 귤 농장들과 동백꽃이 번갈아가면서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모퉁이를 돌아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문제가 생겼다. 오 마이 갓! 휴무날이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오늘 월요일이지 참!' 휴무날 체크는 필수인데, 요일감각이 없어졌다. 잘못 본건 아니겠지...? 싶어 주위를 맴돌다가, 현실을 자각하고 또다시 허탈감이 몰려온다. 친구들은 얘기했다.
"오늘도 무사히 넘어가지 않는... 미리미리 알아보라고 제발요!"
할 말이 없다. 누군가 제주를 여행한다고 하면 꼭! 어딜 가든! 목적지의 휴무날을 체크하라고 얘기해줘야겠다.(나 나 잘하자!^^) 아쉬운 대로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조용한 마을을 걷는데, 집집마다 있는 귤나무들에 괜스레 또 웃음이 난다. 누가 말하지 않았는가? '제주도 사람들은 집집마다 귤나무가 있냐는 것이 정말이냐?' 질문에, '그것은 편견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 집은 있다.'라고 왜 그런 대답이 나오는지 알 것 같은 이 제주 마을의 풍경이 너무 좋다.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햇빛을 받아 점점 익어가는 노란 귤나무들과 동백나무들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니 역시나 바다와 야자수가 보인다. 위미에서는 바다를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늘도 1일 1 바다를 한다. 수목원에서는 흐리던 하늘이 이곳은 또 맑은 하늘과 햇빛 때문에 바다 위로 윤슬이 가득하다. 이국적인 야자수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한다. '이곳이 정말 한국이 맞는 걸까?' 제주는 늘 이렇게 넋을 잃게 만든다. 이 평온함과 충만한 행복을 오래오래 잃지 않고 싶다. 이 감각이 무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의 마지막 도착지 스틸 네거티브 클럽.
서귀포에 있었던 2주가 담긴 필름 3통을 현상하기 위해 다시 찾았다. 아마, 이번 여행에서 이곳을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필름 현상을 맡겼다. 필름을 맡기는 일은 뭐가 나올지 모르는 랜덤박스의 포장을 뜯기를 기다리는 일과 같다. 뭐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문이라고 혼자 내적 친밀감이 높아져 생긴 용기에, 사장님께 필름 사진 잘 찍는 법에 대해서도 물어보기도 하고, 남은 여행에 쓸 필름도 더 구매했다. 3통의 필름을 현상하는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는 얘기에 어두워지기 전에 길을 다시 나섰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서귀포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시장에서 떡볶이와 흑돼지 크로켓 그리고 맥주를 사서 돌아왔다. 소박한 마지막 만찬. 다 먹고 나면 이제 짐 정리를 해야 한다. 다음 숙소에 짐을 먼저 보내는 짐 옮김이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내일 아침 8시 30분까지 데스크에 놔달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걸 또 언제다 정리하냐...' 뭣도 모르고 트렁크에 있는 짐을 다 빼놨더니 짐을 어떻게 쌌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것저것 사느라 짐이 늘어나버려서 골치가 아프다.
어쩔수 없지! 어떻게든 되겠지! 이번엔 짐을 다 싸놓고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겨놔야겠다.
한참 정리를 하던중 필름 현상이 완료되어 메일을 보냈다는 문자가 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진을 다운로드하였는데... 그랬는데.... 그랬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망했다. 야외에서는 무조건 채광 밝은 날! 무조건 플래시 터트리라고 하더니... 왜 이런 결과물이 나온 거죠? 네? 말해주세요 네이버 선생님. (응. 너가 똥손이야)
이번에도 절반은 망한 사진 대 파티! <제주도 망한 사진 모음집 2>이다. 동백꽃 사진을 기대를 제일 많이 했는데 도대체 이게 뭐람? 포토샵으로 보정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아주 심각하다.(잠깐.. 눈물 좀 닦고...)
슬픈데...마음이 아픈데...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괜찮아... 핸드폰으로 예쁘고 멀쩡한 사진 많이 남겨서 다행이다... 이것도 다 추억이지 뭐.'
만족스러운 마지막날 밤이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제주동백수목원-> 취향의섬-> 스틸네거티브클럽-> 서귀포올래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