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밖 제주의 나태한 기록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에필로그에 놀라셨나요?
29살에 떠났던 제주도 한달살이의 일기는 눈밭에서 굴러다닌 일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습니다. 어쩌면 2일동안 면접을 보러 다니다가 바로 육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으니 일기를 적을 겨를이 없었던것 같아요. 그 후로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정말 제주에 취업해서 살고 있는지 궁금하신 분이 있으실까 봐 적어보자면... 결론은 그런 낭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하루에 면접을 3개씩 보러 다니면서 취업에 성공하고, 집도 알아보고 정말 몸뚱이만 제주도에 있으면 되는 상황까지 갔었지만 제주도와의 인연은 딱 거기까지였나 봅니다. 제주도에서 직장을 다니며 살게 될 줄 알았던 제주도의 2막은 본가에 짐을 가지러 왔다가 일이 생겨서 엎어지게 되었어요. 그 후로 서울로 올라가 영상 학원을 다니다가, 취업을 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대학원(?)도 가고 얼렁뚱땅 얼레벌레 우당탕탕 살고 있습니다. 정말 사람일은 모를 일이죠? 저도 놀랍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제주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라면서요.
후회되냐구요? 아니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만 있을 뿐, 지금 저에게 주어진 기회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주도 한달살이 한것을 복권을 구입한것에 비교한다면 3등 정도에 당첨된 것 같은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이정도면 꽤 괜찮았던 것 같아요. 낭만, 위로, 반짝거리는 무언가 가득할 줄 알고 시작한 한달살이 었지만 설렘은 찰나였고, 처음 느껴보는 고독함과 외로움, 어디서 태어났을지 모를 불안함 때문에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시간을 보냈던것 같아요. 그 시끄러운 감정들을 재우기 위해서 쓴 일기를 마무리하기까지 긴 시간이 지났네요. 코로나 환자가 10명이나 나왔다고 호들갑 떨었던 것을 보면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싶습니다.
여행 후 남은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 용기 내어 카약을 탔던 B와는 취향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고, 사려니숲길에서 만났던 동갑 친구는 아직까지도 안부를 묻고 서로를 응원하는 친구가 되었어요. 함께 여행했던 언니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마지막 애월에서 머물렀던 앨리스 사장님은 근사한 숙박시설을 새로 리뉴얼하여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조만간 방문해보려고 해요.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는 모습이, 그때의 인연들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왜인지 모르게 코끝이 찡 해집니다. 모든 것은 지나갔지만 사람이 남았어요. 그리고 모든 것을 잘 흘려보낸 '나 자신'까지도요. 특히 처음으로 완전한 혼자가 된 경험은 제 인생의 큰 반환점이 되었고, 지금의 제가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일은 정말 별거 아니었고, 심지어 찌질 해 보여서 웃기기도 합니다. 그 걱정과 고민의 감정들을 읽으며 웃음이 나는 것을 보면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외로웠지만 행복했던 여행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취미 수집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