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취미수집가 Oct 15. 2022

[제주도한달살기] 제주도 별책부록-서른 여덟번째 밤

눈이 엄청 왔다. 다행히 산간 아래는 눈이 녹아 길이 미끄럽지 않았지만 한라산을 비롯해 한라산을 관통하는 길은 등반 및 입장 금지한다는 뉴스가 흘러 나온다. 눈이 정말 많이 오긴 했나보다.


조식을 간단히먹고 오전내내 이력서를 몇군데 더 넣은 뒤 점심을 먹으러 호탕에 갔다. 내일 하루종일 면접을 보러다녀야 했으므로 호탕의 양지탕면을 먹을 수 있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날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겨울이 되면 붕어빵과 뜨끈한 어묵, 델리만쥬처럼 이 양지탕면이 떠오를것 같다.(아- 벌써 그립다.) 양지탕면 한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내고 다시 숙소를 가려던 찰나 앨리스 사장님이 눈을 보러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눈! 눈! 눈! 눈이라니! 쌓이지 않고 녹아버린 눈이 내심 아쉬웠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눈을 보러간다는 사실에 이동하는 차안에서 들뜬마음이 감춰지지 않았다. 마스크 위로 평정심을 유지한 눈빛과, 마스크 안의그렇지 못한 입꼬리가 분명 우스꽝 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일 것이다. 아직 눈에 설렐 수 있는 어린아이같은 마음이 남아있음이 기쁘다.


쌓인 눈 때문에 점점 미끄러워지는 도로에 더이상 차를 가지고 이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목적지 근방에 주차를 하고 걸어가기로 하고 차 문을 열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푹-. 


하고 발이 내려앉는다.




"와...!!!!! 우와...!!! 눈이 진짜 엄청왔네요?!"

이렇게 쌓인 눈을 본것이 언제적이었던가! 누군가 지나간 흔적도 없고, 어떤것도 섞이지 않은 날것 그대로인 하얗디 하얀 눈위에 내딛는 첫 발자국의 쾌감이란! 첫 발을 내딛으며 족적을 남기는 일이 설레고 짜릿하다. 어두웠던 하늘도 점점 맑아진다.



설경보러 가는길




어쩜 이렇게 많은 눈이 쌓였는지! 어쩜 이렇게 희고, 하얗고, 깨끗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장관이었다. 29년 평생 봐왔던 겨울의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우리들은 하얗고 깨끗한 눈 위로 냅다 몸을 던져 뒹굴고, 날갯짓을 하며 천사를 만들고, 달리다 엎어져서 낄낄댔다.

흰 도화지위로 떨어진 굴러다니는 까만 점이 된것은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기분, 꽉 막혀있던것이 뚫린기분, 붙잡힌것들에서 자유로워진 기분. 편안하고 행복한기분을 들게 했다. 왜. 어떻게. 무엇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모를 위로가 온몸을 감싼다. 마음에서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이 마음을 무엇이라 정의할지 모르겠다. 벅차다? 행복하다? 평화롭다? 이 감정은 뭘까. 아. 이토록 얕고 좁은 언어의 세계여... 이 감정에 딱 맞는 단어는 도대체 뭘까.


시야가 안보일정도로 눈보라가 치고, 차가워진 청바지가 살갖에 닿을때마다 시렵고, 축축해진 장갑과 양말이 손과 발을 꽝꽝 얼리고, 눈과 맞닿은 모든 맨살은 감각이 없고, 콧물은 의지와 상관없이 흘렀지만 그런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대의 끝에 온 몸으로 눈밭을 굴러다닌 오늘의 기억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잊을  없을  같다. 한바탕 눈밭에 뒹굴다가 숙소로 돌아와 몸을 녹이고 함께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취기가 올라온다. 지글지글 끓는 보일러에 노곤노곤, 알딸딸한 기분이 좋다. 


아-. 이렇게 좋아도 되는거야? 

너무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도한달살기] 제주도 별책부록-서른 일곱번째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