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첫 숙소에서의 아침. 하룻밤 새 전기장판에 길들여진 몸이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다가 (핑계가 나날이 는다.) 하나둘 밖으로 나가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아마 이 발걸음들의 목적은 조식 룸을 향한 것일 것이다. 이 숙소는 사장님이 주거하시는 집(집 주방이 조식 룸이다.)과 작업실용 돌 창고, 마당, 투숙객용 별채로 구성되어있는데, 조식을 먹기 위해서는 주방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가서 먹고 싶었지만, 낯선 이들과 눈곱도 떼지 않은 채 함께 아침을 먹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낯가림병 때문에 좀 더 방에 있다가 나가기로 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이불 밖을 나와 운동화를 대충 우겨신고 대문을 열어 마당으로 나오니 상쾌한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어쩐지 친근하고 익숙하고 안정감 있는 기분이 시골 외할머니댁에 온 기분이었다. 작은 마당을 지나 조식 룸의 문을 여니 먼저 식사했던 투숙객들의 식사가 마침 끝나 있었다. 두 명 중 한 명이 일정이 있다며 자리를 내어주었고, 다른 한 명은 혼자 밥 먹으면 심심하지 않냐며 앞에 있어주겠다고 하였다. (이 사람도 분명 MBTI의 앞자리가 'E' 임이 분명할 것이다.) 조식 룸의 바닥은 보일러로 지글지글 끓고 따수운 공기가 웃돌고 있었고, 아랫목에는 이 숙소의 마스코트인 고양이 이젤이가 떡하니 자리를 잡아 누워있었다. 꽃무늬 식탁보 위에 먹음직스럽게 놓여있던 샌드위치,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그림의 반가운 식기류, 주방을 가득 채운 향긋한 홍차 냄새, 잔잔히 흘러나오는 발랄한 재즈 까지! 안락하고 포근한 이 공간의 첫인상이 참 마음에 들었다.(이 집 사장님, 나랑 취향이 비슷한 것 같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 고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맛이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식사 내내 앞에 앉아주었던 투숙객은 나보다 두어 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오늘 여행이 끝나는 날이라며 아쉬움을 토했다. 그녀는 이 숙소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그동안의 여행 이야기들과, 숙소 근방의 맛집과 볼거리를 추천해 주었다. 가장 집중해서 들었던 이야기는 근방의 맛집 리스트였는데, 번화가 쪽에 있는 이 숙소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의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3일 내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오늘 점심은 그곳에서 먹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식당은 숙소에서 5 정류장 정도 떨어진 한담근처 골목에 위치한 곳이었다. 식당에 가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장님 부부가 괜스레 반가웠다. 어제저녁 체크인을 하면서 잠깐 본 것이 다이지만, 같은 사람을 두 번 이상 보기 어려운 이곳에선, 그 낯선이 마저 아는 이 처럼 느껴진다. 내적 친밀감이랄까? 사장님은 마스크 너머의 나를 알아보시고 어떻게 왔냐며 반겨주셨다. 강력하게 추천받은 메뉴인 가지 덮밥과 사이다 한 병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 사장님이 말을 걸었다.
"밥 다 먹고 어디 가요?"
"아직 모르겠어요, 계획이 없어서ㅎㅎ 이 근방 걸으면서 동네 구경하려고요!"
"어머, 그래요? 그러면 코너에 맛있는 커피집 있는데, 거기서 커피 테이크 아웃해서 한잔 들고, 한담 해안산책로 걸어요! 곽지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데 진짜 좋아요~"
"헉 그런 곳이 있어요?! 감사해요!~ 한 번가 볼게요!"
순식간에 일정이 생겼다. 해안산책로를 걸어 바다에서 바다까지 걷는 길이라니!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감성에 젖어 홀로 걷는 것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지만, 왜인지 낭만적인것 같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나온 비주얼이 꽤 훌륭한 가지덮밥은 한입 넣자마자 눈이 휘둥그래 지는 맛이었다.(아니, 여기서 이런 맛을 낸다고...?) 가지를 즐겨먹지 않지만, 이 가지 덮밥이라면 나는 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떠난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고, 3일 내내 이곳에 왔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왜인지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식사 후, 사장님이 말해주신 카페에서 커피를 사려고 했지만, 마스크를 쓰고 벗기가 번거로워 그냥 걷기로 했다. 역시 현지인의 추천코스는 묻고 따지지 않고 가야 한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어난 바다와,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를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보고 있으니 물벼락 맞기 딱 좋다. 내 키만큼 솟구치는 파도에 몇 번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몇 번 당한 후에야 멀치감치, 파도의 눈치를 보며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12,563걸음을 걸었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호탕-> 한담 해안산책로(한담에서 곽지까지) -> 제레미 커피-> 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