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말 이제까지 보낸 하루 중에 제일 알찬 하루였다. 오전에 사장님이 해주신 건강하고 감격스러운 조식을 먹고(병아리콩과 각종 야채가 들어간 토마토 스튜), 어젯밤 저녁을 함께 먹으며 친해진 옆방의 언니와 오후에 산책을 하기로 했다. 산책하러 나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사장님이 빌려주신 파스텔과 드로잉북에 그림을 그렸다.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 머물렀던 숙소에서 매일 보던 한라산을 그렸는데, 기분이 알싸하다. 몇 주 전만 해도 매일 보던 이 풍경들을 이제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그곳에 없다는 부재를, 시간의 흐름을 실감 나게 했다. 잡념 없이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그림만 한 것이 없는것 같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오전 내내 그림을 그리다가 '나가자!'는 언니의 말에 산책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날씨가 오랜만에 너무 좋았다. 얼마 만에 이렇게 좋아진 날씨인지! 연신 감탄을 하며 하늘 위에 넓게 흩뿌려진 구름을 감상하며 걸었다. 날씨가 맑다는 이유 하나로 하늘도, 바람도, 바다도 아름다워 보인다. 마음도 함께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기분을 날씨에 빗대어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언니의 가이드를 따라 걷는길은 올레 16길 코스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용암이 흘러내린듯한 바위 모양과,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듯한 곡선이 하나의 작품 같았다.
땅이 아닌, 바위 위에 흙을 쌓아 만든 소금밭도 있었다. 놀랍게도 고려시대부터 400년 동안이나 이 돌 위에서 소금을 채취해 왔다고 하는데, 유적지 위를 걷는 기분이 신기했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고 형태만 남아 관광객들에게 좋은 사진 명소가 되었지만 이따금 높게 치는 파도가 벌집 모양처럼 생긴 염전 밭을 뒤덮고 그 틈에 고이는 바닷물을 보며, 정말 이곳에서 소금을 얻을 수 있겠구나 싶어 신기했다. 언니와 나는 흙 위에 반짝이는 흰 결정체가 소금인가 싶어 눈치를 보다가 맛을 보았는데... 그냥 돌이었다. 하하하. 한참 구경을 하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읍내인 하귀까지 가보기로 했다. 점심메뉴는 언니가 가보고 싶다던 백반집.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택시를 탔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이 닫혀있었다. 갈길을 잃고 주변 식당을 탐방하며 거리를 헤매는 중,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밥 먹을 데 찾아요?, 저기 위에 국수집! 저기 싸고 양 많고 맛있어요! 방금 먹고 나왔는데! 진짜 좋아!"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이의 말에 언니와 나는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침 눈앞에 돈가스집을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아저씨는 메뉴 추천을 해주시고는 가던 길을 마저 가셨는데, 우리가 정말 국수가게를 가는지, 아닌지 보려는 것인지 몇 번을 뒤돌아보셨다. 우리는 눈치를 보다가 일단 가게 분위기 좀 보자 싶어 국수집 앞을 갔다가 국수 한 그릇에 4000원인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들어가보기로 했다. 게다가 가게 이름이 아주 정직하게 <국숫집>이다. 예사롭지 않은 찐 맛집의 냄새가 난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어서 그런지 가게 안은 한산 했다. 자리에 앉아서 삶은 계란 하나를 까먹고 잔치국수와 비빔국수를 주문했는데, 띠용?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국수가 잔뜩 담겨 나왔다.(분명 잔치국수 1인분과 비빔국수 1인분을 주문했는데요...?) 그 와중에 국수는 또 맛있어서 또 놀랐다! 멸치와 야채 육수의 깊은 맛! 달짝지근하고 새콤한 비빔국수의 맛! 원래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진짜 무섭게 맛있는 맛이었다. 배가 고팠던 터라 다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한 그릇도 다 비우지 못했다.(언제 이렇게 나약해졌는가.) 나중에 숙소 사장님이 말해주셔서 안 사실이지만, 그 국수가게가 인기가 진~~ 짜! 많아서 매일 자리가 없고, 조기 소진되는 맛집이라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방문객 수가 적어져서 맛볼 수 있던 거라며, 계 탄 거라며... 사장님은 아직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고 했다.(와우! 코로나 덕분을 이렇게 볼 수 있구나.)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기분 좋게 읍내 구경을 했다. 빈티지샵, 읍내의 옷가게, 소품 가게, 양말가게를 돌고 나니 양손이 무거웠다. 읍내의 옷가게에서 기모가 달린 오천원 짜리 바지, 양말가게에서 엠보싱 꽃무늬가 잔뜩 있는 양말 두 켤레와, 빈티지 스웨터를 장만했다.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나니, 마음이 든든했다. 마지막으로 지난번 제레미에서 사온 원두를 갈아 함께 먹기 위해 근처의 쿠키 집을 갔다. 가게 안에 들어가자마자 가득 차있는 따뜻하고 고소한 쿠키 냄새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쿠키 냄새에 홀려 스모어 쿠키, 스쿱 쿠키, 브라우니 쿠키, 콘 쿠키... 접시에 쿠키들을 가득 담았고, 밥값보다 더 많이 나왔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하하하! (원래 다 이런 것 아닙니까?) 쿠키 쇼핑을 잔뜩 하고 체력이 방전된 우리는 그 길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사장님께 오늘 다녀온 곳을 신나게 얘기했다. 사장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커피를 내려주셨고, 다같이 쿠키를 먹으며 티타임을 가졌다. 고소하고 짙은 쿰쿰한 커피 향이 입으로 넘어간다. 첫 입에 시고 두터운 깊은맛이 나다가 끝에는 단맛이 느껴졌다. 쿠키의 꾸덕하고 버석한 식감과 달달한 맛의 조화가 아주 잘 어울렸다. 입안에서 황홀한 행복의 축제가 터진다. 행복을 음미하며 티타임을 즐기던 중, 사장님이 주방으로 가시더니 잔뜩 쌓인 파지 귤을 가져와 하나씩 까기 시작했다. 귤잼을 만들 거라는 얘기에 또 다 같이 신나게 귤껍질을 깠다. 파지 귤은 일반 귤과 다르게 그냥 막 자란 귤이어서 돌처럼 단단하고 생긴 것도 진짜 못생겼다. 껍질은 얇은데 얼마나 단단한지! 손톱이 들어가지 않아서 칼로 귤을 깎아 겨우 껍질을 다 벗겨낼 수 있었다. 그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웃겨서 셋이서 얼마나 깔깔댔는지 모른다. 별게 다 즐겁다.
사장님은 도와줘서 고맙다며 귤잼 만드는 법을 알려주신다고 하셨다. 언니와 나는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을 전수받듯 잼 만드는 일에 열심히 참여했다. 믹서기에 귤을 갈고, 계량에 맞게 설탕과 함께(1:0.3 비율) 한번 팔팔 끓인 뒤, 약한 불에 오랜 시간 졸이면서 타지 않도록 저어주면 주스 같던 액체에 점성이 생기면서 평소에 많이 보았던, 귤잼이 완성! 중간중간 알람을 맞춰놓고 상태를 확인하고, 끓이면서 생기는 뿌연 막을 숟가락이나 국자로 걷어내 주는 것, 그리고 열전도를 빼기 위해 쇠로 된 국자를 꼭 꽂아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하셨다. 이렇게 함께 만든 잼을 내일 아침에 함께 먹을 것이라 생각하니 설레고 즐거웠다. 잼이 졸여지고 식는 동안 무엇을 할까 하다가 돌 창고 작업실에 트리를 만들기 위해 모아둔 재료가 있어서 함께 만들기로 했다. 트리라니! 그렇다. 벌써 12월이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나는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까?)
오늘 만들 트리는 일반적인 플라스틱 나무에 오너먼트를 장식하는 일이 아니라, 산과 바다에서 주워온 두꺼운 나뭇가지를 실로 엮어 만드는 트리 었다. 트리에 장식되는 오너먼트 또한 공장에서 찍어낸 화려한 색상의 장식품이 아니라, 자연에서 얻어온 억새, 솔방울이나 돌, 나뭇가지가 주 재료였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사장님의 마음이 좋았고, 트리와 장식 오너먼트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나뭇가지들은 형태, 굵기 단단함의 정도들이 다 달랐는데, 목재 자체가 다른 이유도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바다에서 주워온 것인지, 산에서 주워온 것인지에 따라도 다른 것이다. 산에서 주워온 것은 잘 부러지고, 나무껍질이나 부스럼이 있는 반면, 바다에서 주운 나무들은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바다의 소금물에 적셔지고 말려지는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할수록 경도가 강해지고 색도 밝아진다고 하니 신기하다.
하지만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나무를 실로 이어야 하는데 엮는 과정이 영... 꼬아도 보고, 감아도 봤지만 뭔가 계속 어설펐다. 하지만 포기하거나 짜증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멋진 사람들!) 한참을 헤매며 여러 방법을 시도한 끝에 방법을 찾았고,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이라 허탈해 했다. 이런 재료들 가지고 소품 하나하나 만들고, 엮어 화룡점정인 조명까지 달아주니 꽤 그럴듯한 트리가 완성되었다. 불을 다 끄고 조명을 키니, 다들 리액션이 좋은 방청객이라도 된 듯이 탄성이 나왔다.
"와 아아 아~~~~!!!!"
예쁘기도 예뻤지만, 함께 만들어서 더 뿌듯했다.(허헛, 예쁘구먼. 코 쓱) 사장님은 드림캐쳐를 만들어보겠다며 나무와 실을 이리저리 엮었는데, 그 모양이 악몽이 한번 잘못 걸리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 모양이 되어 우리는 또 깔깔대며 웃었다. 이렇게 수다 떨며 깔깔댄 것이 언제 적인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비슷한 취향의 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하면 이렇게 편하고 좋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한 달 가까이 제주도를 떠돌고, 숙소를 떠돌며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접어 마지막으로 도착한 이곳이 내가 꿈꾸고, 바랬던 제주도의 생활이었던 것 같다.
너무 열심히 트리를 만든 탓에 허기가 진 우리는 치킨과 맥주를 먹으면서 또다시 수다의 꽃을 피웠다. 수다를 떨다가 알게된 사실인데 사장님과, 옆방 언니, 나 모두 같은 전공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쩐지 그래서 이렇게 잘 맞았나 보다 하며 또 신기해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고, 함께하는 시간들이 즐거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고, 알찬 하루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금, 여기서, 나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신엄리 동네 산책-> 구엄리 돌염전-> 하귀 읍내구경(퍼플모스/마루쌀롱/라임리본/국수집/쿠키키)-> 앨리스 그림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