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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미수집가 Aug 12. 2021

[제주도한달살기]우당탕탕제주도
애월24일차(2)

♫ 장필순 - 애월 낙조

마지막 여행지의 종점은 애월. 일주일 동안 머무르게 될 숙소의 날짜가 미뤄지는 바람에, 붕 떠버린 하루를 수습하기 위해 급히 예약한 숙소는 침대 머리맡의 네모난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이번 여행에서의 가장 비싼 값을 치른 숙소이다. 숙소 값의 뽕을 빼겠다는 핑계로 밖에 나가지 않고 숙소에만 있기로 했다. 구태여 나갈 필요 없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애월의 바다가 육체의 피로와, 마음의 짐을 다독여준다. 

특별히 할 것 없는 숙소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낮잠 자기, 침대 위에서 물 멍하기, 파도소리 듣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책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 긋기, 밀린 일기 쓰기. 이 보잘것없고 시시한 일들이 주는 평안은 나를 충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절실하고 간절히 원했던 시간이었다. 연비가 똥망이라 얼마 가지 못할 테지만, 충전이 쉬우니 이 정도면 가성비 좋은 행복이 아닌가.



오늘의 유일한 일과인 낙조를 보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다. 남쪽의 서귀포, 동쪽의 함덕, 그리고 마지막 서쪽의 애월을 선택한 이유의 방점은 낙조에 있었다. 어슴푸레 내리는 어둠 아래 가장 붉은빛이 떨어지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곳 애월. 그 말 한마디에 애월을 왔고, 진 주홍빛으로 덮인 하늘과 붉게 타오르는 커다란 태양을 보며 듣지 않을 수 없는 장필순의 <애월 낙조>. 비록 옆에 '노을이 물든 너'는 없지만 말없이 눈으로 담는 애월 낙조와 곱씹어 듣는 가사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제주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애월을 선택한 것은 아주. 무척. 상당히. 대단히. 참. 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낙조의 향연이 끝난 뒤, 자리를 빼앗길 일도 없는 어둠이 순식에 내려앉았다. 옥상에서 내려와 저녁을 예약해둔 <랑지다>에 갔다. 랑지다는 제주도 방언인 '부지런하다'의 뜻을 가진 비스트로 식당인데, 70년 된 이발소를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 가게의 호기심을 더해주었다. 여섯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 테이블 하나가 전부인 가게 안은 협소 하지만 아늑했다. 몽글해지는 캐롤과, 무엇보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고양이가 이 아늑함에 크게 한몫했으리라. 

따뜻한 난로가에 앉아 잠을 자던 녀석은, 누가 옆에 있던 말던, 사진을 찍던 말던, 자신을 쓰다듬던 말던 잠을 자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토록 걱정 근심 없이 행복하게 잠들어있는 고양이라니! 냥팔자가 상팔자인, 팔자가 아주 좋은 녀석이다. 고양이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가게 주인은 필시 좋은 사람일 것이고, 이곳은 맛집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운 몸을 녹일 면요리와 추천해주신 칵테일을 주문하고 정면을 보니, 고양이에 한눈이 팔려 스치듯 봤던 커다랗고 짧은 문장이 마음을 후벼 팠다.



'삶에는 빈칸들이 많다.' 고작 아홉 글자밖에 안 되는 이 문장이 뭐라고... 문장에서 말하는 빈칸이 나 같아서 울컥했다. 애써 감추고 다독이고 있던 불안함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불안한 '나', 가진 것 없는 '나', 확신이 없는 '나', 텅 비어있는 '나', 전전긍긍하고 있는 '나', 빈칸 안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나에게 원래 삶은 그런 거라고, 그런 빈칸들은 건 별거 아니라고, 그런 때도 있는 거라고,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었다면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마스크 안으로 흘러내리는 콧물과 눈물을 누가 볼세라 닦아내기 바빴고, 새어 나오는 울음을 누가 듣을세라 칵테일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겼다무방비상태에서 받는 위로는 눈물도 무방비상태로 흐른다. 이 대책 없는 콧물과 눈물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훔쳐내야만 했기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울음을 뱉어낸 마음을 달래 보려고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패딩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돌아왔다. 취식이 금지된 숙소는 냉장고가 없어 창문틀 위에 맥주를 올려놓고 윤희 언니와 통화를 했다.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주요 쟁점은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 와 과자를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얘기였다. 제주에 오기 전 집에서 챙겨 왔던 과자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그 과자를 오늘까지... 무려 24일 동안이나 가지고 다녀서, 오늘 맥주와 함께 꼭.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내일 또 들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버릴 수는 없고, 먹기는 싫고, 이제는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듣던 언니의 말에 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왕 먹을 거 맛있게 먹어야지, 억지로 먹지 마."


그러게, 이게 뭐라고 구태여 억지로 먹으려 했을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먹는 것 까지도 억지로, 꾸역꾸역 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놀랐다. 나는 왜 이렇게 강박에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한 걸까. 그런 나를 멈춰준 언니의 말이 고맙고 위로가 되었다. 그러면 맥주는? 맥주도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마시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고민하는 사이에 미지근해져서 이맛도 저 맛도 아니게 되었다. 태어나서 마셔본 맥주 중에 가장 맛이 없었다. 한 모금을 마시고 세면대에 다 부어버렸다. 아, 정말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빠른 결단과 실행으로 타이밍을 잘 맞출 수는 없는 걸까? 이건 통계나 확률, 공식으로 답을 구할 수 없는 변수투성이의 날씨보다 더 알수가 없다. 30년을 가까이 살아도 나는 내가 너무 어렵고 낯설다. 그저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되지 않기위해 이 제멋대로인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싶은데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말이 아닐 수없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얼마다 더 살아봐야 나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도 우물쭈물하다 하루가 다 가버렸다.



*다음 이야기는 본격 애월에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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