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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미수집가 May 14. 2022

[제주도한달살기] 제주도 별책부록-서른 세번째 밤

제주도의 산티아고 순례길인 올레길.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이라는 뜻을 가진 올레길은, 제주도 출신의 한 언론인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고 돌아와 만든 길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애정을 시작으로 만들어진 이 길 덕분에 사람들은 제주의 자연과 더 깊게 교감하고 눈물과 위로와 안식과 추억, 영감 같은 것을 주고받으며 제주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이렇게 제주와 교감할 수 있는 걷는 올레길이 있는가 하면, 위로를 주는 읽는 올레길도 있다. 바로 '제주 책방 올레'이다.


평소에도 독립서점이나 소품샵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서 여행을  때마다 한두 군데씩 들르는데,  제주에는 그런 곳이 60곳이 넘는다고 한다. 덕분에 제주에 올 때 1권이었던 책이 벌써 10권이 되었고...(이 무게 어쩔 거야...) 사실 10권의 책을 가지게 된 데에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바로 '지도'였다. 재미있고 개성 넘치는 독립출판물과, 주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이 흥미로운 서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는지, 어느 여행사에서 '제주 책방 올레 지도'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지도에는 서점을 소개하고 투어 할 수 있는 콘텐츠와, 지도를 가지고 서점을 방문하여 책을 구입하면 서점의 스탬프를 찍어주는데, 지도를 펼치는 순간 스탬프가 찍혀있지 않은 공간들을 모조리 채우고 싶은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마치 포켓몬 빵의 스티커를 모으는 기분이랄까?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이벤트이다. 원래도 서점이 보일 때마다 틈틈이 방문했는데, 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도장을 찍기 위해 서점에 일부러 방문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책방 문을 열면서 다짐한다.


1. 도장을 찍자고 아무 책이나 사지 말 것. 

2. 꼭 읽고 싶은 책을 살 것. 

3. 읽고 싶은 책이 없다면 사지 말 것. 


하지만 이 매력 넘치는 서점 안에서 '책을 사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는 없었고, 지도 위에 도장이 찍힐 때마다 나의 손에는 책이 한 권씩 늘어났으며, 뿌듯함과 비례하며 나의 지갑은 얇아져 갔다.


그런 나에게 앨리스 사장님이 가면 정말 좋아할 것 같은 책방이 있다며 추천해 주셨다.  <바라나시 책 골목>이라는 곳인데 정말 입에 붙지 않아서 몇 차례를 물어봤는지 모른다.(네? 바... 바 뭐라고요?) 누워서 책을 보다가 잠을 자도 되며, 짜이가 맛있고,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경지의 오른 사장님이 계시는 곳이라니 말만 들어도 몹시 궁금해져서 빨리 길을 나섰다.




제주시내 근처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길을 지나 지도를 더듬거리며, '여기 어디쯤에 있는데...'라고 생각했을 때 존재감 있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며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책방 입구를 찾아 들어가니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바라나시책골목, 블루베리토스트와 짜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온통 주홍색인 천장과 벽, 인도풍의 장식과 소품, 독립출판부터 중고서적, 팔지 않는 오래된 책, 요가 수업이나 명상시간에 들을법한 음악이 공간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책방지기라고 불리는 사장님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리즈가 인도 수련원에서 만난 사람 같았다. 곳곳에 책방지기의 색깔이 그대로 묻어난 공간을 감탄하며 확장된 동공으로 사방을 둘러 보다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이 꼭 마셔보라던 짜이와 블루베리잼이 들어간 토스트를 주문하고 읽을 책을 골랐다. 눈에 들어온 것은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이었다. 제목부터 강하게 끌렸다. 세상에 있는 각종 달콤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말이 가득한 책이었다. 어떻게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렇게 표현하고 쓸 수 있는 글이 계속 있을 수 있는 걸까?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모든 내용을 필사하고 싶고, 모든 단어를 씹어먹고 싶었다. 새삼 말의 힘에 대해 또 느낀다. 어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콤하고, 아름답고, 황홀한 마약 같으면서도 어떤 입에서 탄생하는 말을 귀를 씻어내야 할 만큼 고약하기도 하는데, 어떤 말을 가까이하고 마음에 담아두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나는 전자의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책 구입과 함께, 스탬프 하나를 찍고 나니 뿌듯함이 몰려온다. 구입한 책은 숙소에 가서 아껴 읽기로 하고, 이곳에서가 아니면 읽지 못할 책들을 읽으며 느꼈다. '이 책방지기는 찐이다!', 속된 말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다르다. 공간도 공간이지만, 책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니 애정으로는 부족하다. 애정을 초월한 지독한 사랑이다. 그 사랑에 파묻혀 종일 책을 읽고 싶었지만 벌써 다섯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그 뒤로 근처 책방에 들러서 또 책을 샀다^^) 오늘 이곳을 오길 참 잘했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바라나시 책골목 -> 미래책방 ->하늘김밥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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