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다시 찾아가는 착한 책 <나다움> #3

Reason 나다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배우지도,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나의 특별함이 뭔지, 원하는 삶이 뭔지 말이에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몇 명이나 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동안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생각해 왔고,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서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답할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무엇이 특별한가요?"


이 질문에 선뜻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이 특별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든다.


"나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우리는 왜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 있게 정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살고 싶은 삶,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더 적지 않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거나, 그냥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회사에 취업하고, 결혼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등 확실한 답을 구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자신 있게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집에서나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항상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문화적, 사회적, 교육적인 다양한 이유로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고, 들과 비슷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들을 하나씩 풀어서 다뤄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먼저 당신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며, 이와 동시에 자신에 대한 정의와 다른 사람과 다른 무엇을 찾아서 ‘나다움’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넘사벽 ‘엄친아’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치고 ‘엄친아’라는 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딸’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인물이면 인물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번이라도 듣지 않은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존재하는지도 모를 ‘엄친아’라는 존재와 학교에서, 집에서, 주변 어르신들에게 참 많이 들었다. 지난 시절의 경험을 잠시 꺼내보면 존재하는지도 모를 ‘엄친아’들과 참으로 많이 비교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예를 들어보면 조례 시간에 종종 담임선생님께서 하신 이야기이다.


“너희들, 지금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냐! 지금 ○○고등학교 의 학생들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알아? 정신 좀 차리고, 좀 열심히 해봐라.” 


‘엄친아’와의 비교는 비단 학교를 다닐 때뿐만이 아니었다. 사회에 나와선 이렇게 비교를 당했었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 김 모 군이라는 후배가 있었다. 그 친구는 일을 얼마나 성실히 잘하는지 알아? 그 친구는 너랑 똑같은 나이 때, ○○일을 불과 하루 만에 해 왔다. 그것도 밤을 새워가면서, 넌 도대체 뭐냐?”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엄친아'와 비교당하는가?

‘엄친아’와의 비교는 사실 분발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 선생님, 직장의 선배들은 기를 죽이려고 ‘엄친아’와 비교한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특별한 자극을 주고, 그 자극에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긍정적인 의도가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첫 번째 부정적 효과는 ‘학벌지상주의’다. 우리 사회에서 ‘엄친아’의 첫 번째 조건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성적 1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나 그 수준이 심각하냐면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인식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성적을 위해서라면 학교 공부도 빼먹고, 학원가는 것을 인정해 주고, 성적만 오른다면 장래의 남편 직업과 아내의 얼굴이 달라진다는 우스갯소리가 마치 진리인양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두 번째 부정적 효과는 ‘외모지상주의’다. ‘엄친아’가 되기 위해 첫 번째 조건인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모두 ‘엄친아’가 되지 못한다.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말이 바로 “쟤는 저 인물에 공부라도 잘해야 먹고살지”라는 말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성형과 미용에 관심을 가진다. 그 결과 ‘성형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세계인들로부터 조롱받게 되었다. 


세 번째 부정적 효과는 ‘자존감 저하’다. ‘엄친아’의 의미를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말 세상에 존재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그 인물을 뛰어넘을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 기준이 높다. 그 결과 대부분 의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엄친아’의 장벽을 넘을 수 없다. 그래서 ‘엄친아’와 비교당하는 당사자는 마음의 상처를 얻고, 자존감 저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3가지 부정적 효과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대상 '엄친아'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그 비교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 결과 자신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 지에 대한 고민과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모르고, 원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 아직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른다고 너무 자기를 비하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엄친아’와 비교하는 우리의 문화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누군가와 비교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잘못된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를 찾고, 만들어 가면 되니까 말이다.


4지 선다형 교육

2018년 8월 25일이라고 기억한다. BBS의 이각범의 화쟁토론. 이 프로그램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교육의 문제’라는 주제로 전문 패널들과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본 적 있다. 토론의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 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현재의 교육으로는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지금의 교육 문제에 대한 토론이었다. 이 토론 과정에서 전문패널과 사회자는 좋은 점수를 받아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4지 선다형"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4지 선다형" 평가로 인해 획일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고,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생각하는 힘에 기반한 창의성, 협업력, 융합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우린 특별한 나를 찾지 못했을까?

우리는 어떤 대학을 다니고, 어디서 일하고, 어느 곳에서 사는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대학을 다니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좋은 곳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 너무나 만연하다 보니 교육이라는 것도 그런 우리 사회의 요구에 맞춰 수정되고, 변경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사회의 요구에 맞춰 변화되고, 수정된 교육은 한 번도 교육 대상자가 중심이 된 적이 없다. 오직 성적에 의해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고, 그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양성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를 증명하는 내용이 앞서 언급했던 이각범의 화쟁토론에 나온 싸이(PSY)에 대한 패널들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한 전문패널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글로벌 인재포럼에서 김용 총재께서 이런 얘길 하시더라고요. 싸이하고 저녁을 했답니다. 그런데 싸이가 똑똑하더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똑똑함이 공부 잘하는 똑똑함이 아니고, 그 영역(음악)에서 정말 똑똑하더라. 그런데 한국 교육은 모든 아이들을 한 가지 틀에서만 똑똑함을 인식하니까 문제입니다.”

- 민경찬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의 이야기 중 -


민경찬 교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성적이라는 잣대에서는 똑똑하지 않더라도 어느 특정한 분야에서는 충분히 똑똑하고, 최고의 역량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도 않을 뿐 만 아니라 그 분야를 찾게 도와주지 못하는 지금의 교육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일까?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인이 무엇에 관심 있어하고, 좋아하며,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할 수 있도록 그 힘을 키워주는 외국의 교육을 선망한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과 프랑스, 핀란드다. 이스라엘은 자녀를 교육할 때 끊임없는 질문으로 사고의 확장을 유도하고, 획일적인 지식을 주입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그룹을 지어서 질문하고, 토론을 지향하여 편향된 사고를 가지는 것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인 지식탐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며, 소통하고 협업하는 힘을 키워준다. 그 교육이 바로 "하브루타"다. 프랑스는 "카드레"를 통해 아이에게 상황별로 규정한 틀 내에서 무한한 자율과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여 무엇에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 찾게 도와주고, 다양성을 인정해 준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 교육 수준 1위의 핀란드에서는 모든 과목에서 객관식을 배제하고, 주관식으로 문제를 출제하여 자신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펼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사고의 확장을 도와준다. 이와 더불어 수업시간에도 어떤 특정한 주제를 바탕으로 스스로 지식을 탐색하게 하고, 그 탐색한 지식을 반친구, 선생님과 공유하고, 토론한다. 이러한 핀란드의 교육을 "데몰라"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프랑스의 ‘카드레’, 핀란드의 ‘데몰라’ 하나같이 개인과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신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좋아하며, 어디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조기에 찾아 주는데 주안점을 둔 교육들이다. 이스라엘, 프랑스, 핀란드 등 교육 선진국의 교육이 정말 부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교육을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답게 사는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찾고, 만들어 가면 되니까 말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 속담은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남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말로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두각을 나타내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튀지 말라는 것이다. 이 속담 때문일까?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다니던 학교에서, 직장에서, 각종 모임에서 그 어디에서든 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튀어 봤자 돌아오는 것이란 비난의 화살 또는 날카로운 주변의 눈초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대학과 대학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튀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에는 공부보다는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독서하기를 좋아했으며, 남들과 조금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헤어 스타일을 하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 그렇다고 교칙에 어긋났다는 것은 아니다. 교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교묘하게 걸쳐 다녔다고 할까? 아무튼 보통의 고등학생들과 비교해서 좀 많이 튀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남들보다 다소 늦게 공부에 재미를 느꼈다. 당시 경제학을 전공하였는데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그래서 수업시간이 끝나가도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남들은 힘들다고 그렇게 꺼리는 금융공학, 수리경제학, 통계학을 찾아서 들었다. 직장에서는 편한 일보다는 남들이 꺼리는 일들을 하는 것을 즐겼다. 업무시간 이외에도 남아서 논문을 읽고, 책을 읽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도, 대학과 대학원에서도, 직장에서 상사한테 너무 튄다는 소리를 들었고, 항상 자제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것이 비단 나 하나뿐이겠는가? 아닐 것이다. 조직에서, 모임에서,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다르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소리를 적어도 한 번 이상 들었을 것이다. “모나면 정 맞는다”는 말을 듣고, “제발, 둥글게 살아라!”라는 조언을 들으면서 말이다. 


왜 우린 튀면 정을 맞아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고 연구하는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E. Nisbett)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2010년 아는 지인의 추천으로 리처드 니스벳이 2003년에 집필한 저서 《생각의 지도》를 읽게 되었다. 그 책에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실험하고 그 결과들을 담고 있었다. 책의 내용 중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의 배경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가정한다. 개개인은 독립적이고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이나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전체 관점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개인은 집단에서 튀지 않으려 하며, 조화로운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며, 만약 잘난 체하거나, 튀게 되면 그 사람을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무엇이 특별한지, 정말 살고 싶은 삶,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동양문화의 특성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동양문화의 특성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런 결과는 자신이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특별함’,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성’의 또 다른 이름 ‘문제아(兒)’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몇몇 친구들과 댄스동아리를 만들어서 춤을 배우고, 췄다. 어려운 춤동작을 배우다가 다치기도 했고, 일과 시간 이후 하루 서너 시간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힘들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이 시기에 물론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친구들에게 붙은 또 다른 이름은 ‘문제아’였다. 단지, 공부를 잘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춤을 추고,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닌다고 붙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문제아’였을까? ‘문제아(問題兒)’의 사전적 의미는 지능(知能), 성격(性格), 행동(行動) 따위가 보통(普通)의 어린이와 뚜렷이 달라 특별(特別)한 취급(取扱)을 필요(必要)로 하는 아이다. 이 사전적 기준에서 친구들과 나는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성격이 아주 이상하다거나, 문제 되는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성적 이외에는 학교에서 그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우린 ‘문제아’란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문제아’였던 것이 아니고, 남들과 달리 공부에 매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것을 들고 다니던 개성이 넘치는 이들이었다. 나와 친구들처럼 공부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입고, 좋아하는 것을 들고 다닌다고 ‘문제아’란 소리를 들었던 것이 우릴 뿐일까? 


왜 개성 있는 사람을 ‘문제아’로 이야기하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까지도 ‘문제아’라고 부른다. 정말 ‘문제아’는 사전적 의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것이 아닌 데 말이다. 그렇다면 왜 개성 있는 사람들까지 ‘문제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편견 때문이다.


편견(偏見)의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많은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편견은 기대나 태도로부터 생기는 것인데 편견이 주로 사회적으로 학습되며, 객관적이거나 충분한 근거 또는 증거 없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견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머리를 염색한 사람, 몸에 문신을 한 사람,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편견 아래 개성 있는 사람들 마저도 ‘문제아’로 여겨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남들과 생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고,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고, 남들과 다른 것에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을 접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이 슬프고, 가슴 아프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편견이 무섭다고 행복한 삶을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삶은 나의 것!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때마다 불쾌한 감정을 가득 실어서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을 네가 살아 줄 것 아니면 신경 꺼!” 


그렇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삶은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 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이런 우리들이 안타까웠는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신 이어령 문화평론가가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뿐인 내 인생 어떻게 살고 있나요? 남들이 볼 때는 교수, 장관, 언론직까지 안 해본 것이 없다고 할 테지만, 나는 사실상 내 인생은 굉장히 좁게 살았어요. 

-중략-

천재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모든 사람은 천재로 태어나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런데 천재성을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사람들이 덮어 버려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덮고, 직장에 가면 상사가 덮고, 자기가 덮어 버려요. 그래서 늘 내가 하는 이야기가 360명이 뛰는 방향을 향해 쫓아서 경주를 하면 아무리 잘 뛰어도 1등부터 360등까지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남들이 뛴다고 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뛰고 싶은 방향으로 각자가 뛰면 360명이 모두 다 1등이 될 수 있어요. Best One! 이 아니라 Only One!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돼라.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데 왜 남들과 똑같이 살아? 왜 남의 인생, 남의 생각을 좇아가고, 사람들이 몰린다고 그 길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냐. 대담하게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쓰러져 죽더라도 내가 요구하는 삶을 위해서 그 속으로 가라는 거예요."
 - 2018. 05. 크리스천투데이 이어령 인터뷰 내용 중 -


이어령 문화평론가가 크리스천투데이와 인터뷰에서 남긴 이 소중한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당신 삶은 당신의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무엇이 특별한지,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자기다움으로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판매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던 착한 책

<나다움>
다음 글은 
<나다움> Reason 나다움 "따라 하기 Paradox에 빠져버린 사람들"입니다.
다음 글도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착한책 #나다움 #해보자 #의미있는_삶 #행복한_삶 #퇴사 #행복 #자기다움 #엄친아 #비교 #교육문제 #4지선다 #자존감 #외모지상주의 #성형공화국 #하브루타 #데몰라 #카드레 #모난돌 #문제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