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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비관우자앙비 Aug 23. 2018

나와 월드컵

30대 중반의 월드컵

2018 러시아 월드컵을 1달 앞두고 썼던 글


이상하리 만큼 인생에서 가장 월드컵에 관심 없는 요즘이지만, 따지고 보면 월드컵은 누구나에게나 큰 추억이지 않을까 싶다.


내 기억속의 첫 월드컵은 이 영상의 배경이 되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이다. 광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전학온지 2년이 되던 여름,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온통 월드컵 이야기 뿐이었다. sbs에서 진행하던 ARS 이벤트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에 전화해서 "홍명보"라고 이야기하고,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고 끊는 바람에 답을 맞추고도 선물도 못 받음. (당시 국가대표팀의 일원이던 조진호 전 부산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88 서울 올림픽, 93 대전 엑스포 이후 세계의 일원이자, 실력있는 국가라는 (또한 엄청난 고성장기였던) 대한민국의 국뽕은 약체라 여겨졌던 한국 국가 대표팀이 스페인, 독일, 볼리비아를 상대로 상대적 선전을 했기 때문에 어마무시하게 차오르게 된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내가 중국에 살 때 보게 되었는데, 중국은 아직 월드컵 진출을 못해보았을 때라 학교에서 모든 동학(同学)들의 부러움을 살 때다. 블랑코한테 농락당하고, 네덜란드한테 0:5로 깨지기 전까지... 0:5로 진 그 다음날 학교에서 어마무시한 놀림을 받으며 주먹 놀림 했다가 인생 마감할 뻔 했던 생각이 난다. 


"붉은악마"가 처음으로 매스컴에 타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서포터즈 문화가 발달한 시점이기도 하다. 소년 이동국과 고종수가 케이리그 중흥의 첨병으로 떠 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중국에도 한국 축구의 한류가 불어서, 산동 루넝에 김정남 감독이 취임하고, 충칭의 별이라 불렸던 이장수 감독도 이때 중국에 들어왔다. (중간에 축구에 미쳐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한일전 전날 밤새서 잠실 주경기장에서 뛰어들어가던 생각이 난다. 그 때는 지정좌석제가 아니였다.)


2002년 월드컵은 누구나게에나 아름다운 기억일 것 같다. 사실 평가전부터 대박 조짐이었다. 비오던 아카라카 날, 우리나라는 스코틀랜드를 4:0이었던가...로 박살낸다. 안정환과 윤정환이 아트적인 골을 넣었던 그 경기. 아시아 국가가 유럽 국가를? 이라며 놀랬던 기억이 난다. 불과 1년전 컨페더컵에서 프랑스한테 0:5로 박살났던 기억이 났기 때문에.


월드컵 직전 프랑스와의 평가전 (2:3)을 포함해서, 난 포루투칼(1:0) 전, 스페인전(승부차기 5:4), 독일전(0:1)을 현장에서 보고 나머지는 광화문 광장에서 지켜보았는데, 대학 1학년이라는 에너지와 열정이 국민적 대 축제가 만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상세한 에피소드를 풀지는 못하겠다. 싸이월드 비공개 다이어리를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ㅋㅋ 뉴스에 몇 번 나왔다로 마무리.


2002년 월드컵 이후 스포츠 중계에서 "한국"으로 표기되던 우리나라 명칭은 "대한민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붉은악마 Be the Reds 티셔츠가 전국적 유행을 타면서 여러 버전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여러 스폰서가 만든 티셔츠 중에서 나이키가 만든 완전 리미티드 버전 Be the Reds 티셔츠가 있었다. (나도 한 장 있었다ㅋ)

SKT가 붉은 악마와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캠페인을 벌이자. KTF에서는 Korea Team Fighting이라는 유사 단체를 만들어 캠페인을 벌였다. 온 몸에 바디페인팅을 했던 KTF의 비주얼은 강력했으나, 그 단체는 월드컵 이후 사라졌다. 또 롯데월드에서 대한민국이 어디까지 갈 것 같냐는 설문지에 4강이라고 썼다가 커플 연간회원권이 되서 당시 여친님과 회원권 만든 다음 날 차인 기억도 난다. (애써 담담)


또한 2002년 월드컵은 정몽준이라는 사람을 대선 후보로 올려줬던 이벤트이기도 했다. 결과는 할많하안. 월드컵이 얼마나 국민적인 이슈였냐면, 최초로 16강에 진출하자 (원래는 세계 대회 3위권 입상이 병역 면제), 선수단 전원이 병역 면제 특례를 받기도 했다. 끝나고 위송빠레와 영표리가 PSV 아인트호벤으로, 송종국이 페예노르트로, 을용타가 터키로, 여기저기 진출하면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유럽 리그에서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레버쿠젠의 붐붐차 정도, 허정무랑 쎄오는 좀 애매하고. 최용수가 블랙번을 갔으면 잼났을텐데.


개인적으로는 서포팅이라는 축구 응원 문화에 심취해 있던 시기였는데 남미 클럽들과 훌리건 문화를 탐닉하며 중2병 재림을 겪던 시기이기도 하다. 성남 서포터즈도 했는데, 통일교 소속이라는 것 안 다음에 안함. 이러다저러다 ㅈ될 것 같아서, 서둘러 군대를 갔다. (제가 면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신데, 나름 철원 최전방에서 육군 병장 만기 전역을...)


2006년 월드컵은 군대 전역 후 신촌의 한 호프집에서 맥주를 들이키며 봤던 기억이 난다. 맥주의 고장이던 "독일"에서 열리지 않았던가. 2002년 월드컵 황금세대, 그리고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있었던 대한민국 대표팀에 거는 기대가 정말 어마어마했다. 이번에도 시청 광장에서 응원전이 열릴지는 모르겠지만, 2006년 월드컵 때는 이래저래 많은 응원전이 실외에서 벌어졌었다. "월드컵녀" 마케팅이 기승을 치는 시기이기도 했다. 압권이었던 장면은 프랑스 감독 뒤로 보이던 붉은 악마들. 그 때 환율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붉은 악마가 화면을 꽉 채울 정도로 원정을 갔었다. 신촌 호프집에서 맥주를 삼키며, 나도 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진철이 센더로스와 박치기하며 피를 흘리며, 조재진이 식빵을 구으며 2006년 월드컵은 그렇게 끝이 났다.


2010년 월드컵은 좀 오그라 들었다. "양박쌍용"이라고 박지성, 박주영, 기성용, 이청용 이름을... 아무튼 그렇게 방송국들에서 월드컵 프리 마케팅을 진행했다. 또 나이키가 유니폼에 "투혼"을 박았던 것이 어마무시한 이슈가 되었고. 박지성의 풍차 돌리기 세레모니와 이정수의 헤발슛이 기억에 남았던 2010년 월드컵부터는 왠지 나의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지성의 한일전 산책 세레모니는 역대급이었다.


2014년, 홍명보가 국민적 욕이란 욕을 다 먹었던 월드컵, 러시아 기름손과 이근호와 정성용의 파이아가 기억에 남았던 월드컵이었는데, 그거 빼고는 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는 것을 보아, 이제 내 관심에서 "축구"는 슬슬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2018년, 이제 월드컵이 1달 남았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다. 분명 월드컵은 내 인생의 메인 이벤트 중 하나였는데, 그냥 <응답하라 2002> 드라마나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K리그 MVP는 제이리그를 가지 않는다며 간지 작살이었던, 맥콜 신태용 감독이 욕먹지 않는 그런 월드컵이 되면 좋겠다. 왠지 우리 시대의 스타들이 하나 둘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아무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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