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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비관우자앙비 Aug 23. 2018

경로우대

버스나 지하철에나 붙어있을 것 같은 이 문구가 당구장에 붙어 있다. 퇴직한 60대 이상의 가장들이 주중에 모여 즐길 수 있는 유희로 당구가 하나의 트렌드가 된 지 오래다. 당구장 출입구에는 여섯시 이전에 입장하는 60대 이상 장년들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는 “경로 우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차가 막힐 것 같아 지하철로 이동하는 대낮의 미팅 이동로에는 어김없이 장년층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당구 이야기를 한다. 내가 너 봐줬다. 박사장이 후루꾸로 이겼다. 이 새끼, 저 새끼. 남자는 커서도 애라는 것이 당구라는 놀이 문화로 또 한 번 증명된다.  


내 아버지도 이들 중 하나이다. 모두 은퇴한 고등학교 동창들과 주 1~2회 당구를 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이 되셨다. 집에 계실 때는 빌리어드 채널을 보고, 당구 친구들과 열심히 밴드를 하시며, 가끔은 등산을 하시기도 한다. (열심히 싸우다가 토라지다가 또 세상 절친이 된다) 막걸리는 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되었고, 큣대는 그가 즐겨 잡던 아이언을 대체하고 있었다.


어느새 실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사용하며 유니폼 처럼 입던 양복들에 먼지 쌓여가는 모습을 보며 애둘러 삼구를 치러 나가고 그럴테다. 내가 사무실에서 전화를 돌리고, 엑셀 브이룩업을 걸고, 이메일을 미친듯이 날릴 때, 그의 손 끝에서는 쓰리쿠션이 수타면 뽑아내듯 그려지고 있었을테다.


삼십대는 어찌보면 인생에서 가장 평가가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열정과 적당한 경험이 어우러져 써먹기에도, 써먹히기에도 최고의 연령대다. 아직 꿈을 꾸는 나이이고 예전처럼 가정을 꾸린 비율도 높지 않아 독립된 인생을 살아 나가는. 재무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질풍노도의 시기이기도 하다. 술 마시고 싶으면 혼술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나에게 당구란 장년층을 대변하는 느낌이었다.


오늘 간만에 당구장에서 좋아하는 형동생들이 공 세 개와 막대기 네 개로 두 시간을 노는 것을 구경했다. (사기 다마였다) 난 30이라 게임에 끼기에는 좀 그랬다. 옆 테이블에서도, 앞 테이블에서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본인의 갈길을 녹색 판 위에 그리고 있었다. 당신도 이 공간에서 누군가와 노는 것 같으면서 당신 갈 길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당구장이라는 곳이 동 시대에 다른 세상을 사는 당신과 나를 소환할 줄은 몰랐다.


십몇년 전, 담배 연기가 자욱하던 신촌의 한 당구장에서 홀연히 나타나 500놓고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의 혼을 다 빼놓고 사라지던 아재들이 생각난다. 그 아조씨들도 왠지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음, 잘나가는 자영업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겠다 ㅋ


당구장에서 경로우대 받는 60대들, 과연 그 들이 찾으려 하는 제2의 인생의 길은 무엇이려나. 과연 찾은 길로 후루꾸없이 잘 갈 수 있을까. 대회전으로 아름다운 시마이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그 나이가 되면 어떤 길을 가고 있으려나. 그 때까지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잘 있으려나.


태국 술을 마시니 이런 생각이 드네, 다음엔 베트남 술을 마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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