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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윤정 Oct 07. 2021

중국 넘버원 패키지 디자이너, 판후


중국에는 판후(潘虎)라고 불리는 패키지 디자이너가 있다. 일단 이 디자이너는 외모부터 화려하다. 홍콩 배우 양조위처럼 굵직한 선의 소유자로 외모만으로도 주위의 이목을 끈다. 그러나 얼굴 못지않게 경력도 매우 화려하다. 판후는 천부적인 소질과 집요한 성격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패키지 디자이너의 대열에 올랐다. 그의 디자인은 2016년 레드닷 디자인어워드에서 5개 제품이 노미네이트되었고, 그중 하나가 Best of best로 선정되었다. 그야말로 중국 디자인계의 엄친아인 셈이다.







그런데 이 디자이너가 주종목으로 다루는 패키지가 조금 독특하다. 판후의 대표적인 디자인 작업은 바로 담배 케이스다. 실제 판후는 작업한 지 2년 만에 중국 담배업계 3사의 패키지 외주를 독차지했고, 새 담배 패키지 디자인을 내놓을 때마다 중국 내에서 이슈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사회에서 담배의 위상은 남다르다. 담배는 중국인들의 가장 중요한 기호품이며 사람을 사귀는데 중요한 사교수단 중의 하나다. 따라서 중국 3사의 담배 패키지를 도맡았다는 것은 판후가 현재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패키지 디자이너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심지어 그가 디자인한 담배 케이스 중 2개가 레드닷 디자인어워드와 펜타어워드에 올랐다. 다음 디자인은 충칭중옌공업유한책임회사(重庆中烟工业有限责任公司)가 의뢰한 담배 케이스다. 이 패키지 디자인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중국의 흡연 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중국 사람들은 마작을 하며 담배를 피우는 게 일종의 관례다. 판후는 이 점에 착안하여 담배 패키지의 모티브를 마작의 패에서 가져왔다. 마작의 대표색인 빨간색과 초록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마작에서 제일 상(上)패 중에 하나인 발(發)을 패키지 전면에 형상화했다. 그리고 ‘발’이라는 글씨에는 중국 신화에서 길함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을 묘사하여 유희적 요소를 첨가했다. 형태적으로 완성도가 높으면서 중국의 담배 문화를 응용한, 재미있으면서도 훌륭한 디자인이다.







마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담배 케이스 




펜타어워드에 오른 또 하나의 담배 브랜드는 타이완(台湾)의 지역 담배, <따화(大华)>다. 이 담배는 현재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담배브랜드 중 하나로 ‘따화(大华)’는 세계 속에서 확장해가는 중국의 정체성을 호기롭게 표현하는 단어다. 판후는 이러한 따화의 중국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 목각표현기법을 응용하여 중국의 문양과 상징을 표현했다. 그리고 화(華)라는 문자에 마치 지붕과 같은 형상을 더하여 중국의 전통적인 권위와 힘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디자인에 흥미를 더하였다. 이 담배는 단순히 기호품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전통과 권위를 강조하며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중국의 전통문양을 새긴 <따화(大华)>





이처럼 판후는 패키지 하나하나마다 각 브랜드의 이미지를 다양한 조형 언어로 풀어놓았다. 디테일한 일러스트로 스토리를 풀어놓거나 패키지의 질감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담배 문화를 차용하여 패키지에 적용하기도 했다. 평범한 직사각형의 평면 이미지에서 무궁한 스토리가 펼쳐지는 셈이다.
  
판후의 주력 패키지 디자인 매체는 담배 케이스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고 있다.
  
다음의 사과박스 역시 주목할 만 하다. 이 사과박스는 보통 사과박스 패키지에 등장하는 사과의 싱싱한 홍보사진이나 문구 없이 마치 성경판화를 연상케 하는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게 특징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이브, 뉴튼, 잡스 세계를 뒤흔든 세 명의 인물들이 패키지 디자인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 사과박스 패키지의 이름은 <샤뉴챠오(夏牛乔)>, 영어로 해석하자면 <EvaNewtonJobs>다. 즉 Eva와 뉴튼과 잡스의 앞글자를 각각 딴 것으로 부제는 Three Apples Turn the World Upside Down(三个苹果改变世界)이다.




사과와 관련된 세계의 중요한 인물들을 삽입한 사과박스 패키지 디자인









이 패키지에서는 사과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인물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세계를 뒤바꾼 사과의 힘을 표현했다. 사과의 효능이나 브랜드에 대한 특정한 홍보 없이 사과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들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 이 패키지작품은 2017년 레드닷과 펜타워드에서 나란히 수상하며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 사과박스는 흥미로운 스토리의 힘으로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 판후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다음의 오렌지 박스는 레드닷 디자인어워드에서 수상한 패키지 디자인이다. 박스 가운데에는 한 노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노인은 브랜드 창업주 추스젠으로 중국 창업계에서 매우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1970년대 작은 농가에서 출발하여 300억 원이 넘는 홍타 그룹을 세웠지만 정년퇴직을 앞두고 횡령죄로 수감되었다. 모두들 이 노인이 말년을 실패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노인은 출소 후 74살의 나이로 창업을 했고 오렌지 농장을 차려 ‘중국의 오렌지 왕’으로 다시 태어났다. 판후는 이러한 창업주의 전설에 주목하여 그의 얼굴을 새긴 목각화 일러스트로 무게감 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오렌지 박스 패키지 디자인 









패키지의 지기 구조 역시 창의적이다. 패키지를 밑으로 열면 오렌지가 위로 쏙 올라오고 위에서 닫으면 오렌지가 들어가는 구조다. 진열된 오렌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오렌지를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는 이 패키지는 레드닷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우디(Audi)의 디자인 개발자였던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 교수는 “이 디자인은 오렌지의 운반과 판매에 최적화된 디자인이다. 예쁘고 심플한 그래픽 디자인뿐 아니라 스마트한 패키지의 구조로 우리를 설득했다”라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식재료 ‘제비집(燕孕盏)’ 역시 고급스러운 패키지로 탈바꿈했다. 본래 제비집은 중국에서도 귀한 식재료지만 투박하고 촌스러운 패키지로 오래된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판후는 기존의 제비집 패키지를 현대화하여 고급스러우면서도 전통적인 느낌의 패키지를 만들어냈다. 패키지의 꼭대기에는 점자를 넣어 시각 장애인들의 욕구까지 충족시켰고 십이지 신상을 캐릭터화하여 섬세하게 음각하였다. 그리고 제비 문양을 금박으로 조각하여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제비집 패키지 





내부적으로는 제비집을 담은 패키지를 마치 꽃잎처럼 형상화하였고 바깥쪽에 완충 장치를 넣어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게끔 하였다. 뚜껑을 덮는 기존의 제비집 패키지를 그대로 응용하면서 부드러움과 견고함을 더한 새로운 패키지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제비집 아이스크림 패키지(燕冰淇淋) 역시 남다르다. 제비집의 문양을 다양하게 패턴화하여 맛에 따라 적용했으며 수려한 흑백 일러스트에서 돋보이게 디자인되었다. 또 종이 케이스가 아니라 철통에 담아 다른 아이스크림 패키지보다 냉동 상태가 오래가도록 만들었다.



제비집 아이스크림 패키지 





이처럼 디자인 완성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집요하다. 보통 ‘메이드 인 차이나’에서 연상되는 서투른 마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웬만한 일본과 유럽의 디자이너보다 더 디테일한 완성도로 디자인을 한 단계 격상한다. 그가 자체 프로젝트로 제작한 담배 케이스(扑克牌)를 보면 이런 완성도의 궁극을 살펴볼 수 있다. 지인들에게 나눠 준 판후의 리미티드 에디션은 조밀한 문양부터 금박, 그리고 나무 케이스까지 완벽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완벽주의자인 그의 단면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자체 프로젝트로 진행한 담배 케이스 














판후는 자신의 작업 공간을 스튜디오나 회사가 아닌 ‘실험실’이라고 칭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오류들을 인정하며 수많은 실험을 거친 후에 완성도 높은 디자인 결과물을 내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내놓은 디자인적 가치로는 상업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며 그의 디자인이 고객에게 돈을 벌어다 줘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래야 클라이언트들이 그의 디자인을 더욱 신뢰할 수 있고 그가 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디자인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외모는 물론 디자인 실력까지 겸비한 판후는 이름처럼 디자인계 백수의 왕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중국 패키지 디자인계에서 그의 적수는 없어 보인다. 혹여라도 중국에서 판후가 디자인한 담배 케이스를 보면 담배를 피우지 않더라도 수집해놓도록 하자. 시대에 남을 중국의 입지적인 디자이너의 작품을 고작 담뱃값으로 소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 말이다.



다음은 저서 <중국디자인이 온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846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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