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개론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거나 마음을 써서 보살펴주는 것을 배려라고 한다. 굳이 도와주거나 보살펴주지 않더라도 상대의 입장이 되어 이해해 주고 상대가 불편하거나 힘들어하는 것을 덜어 주려는 것을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면 상대를 아끼고 챙겨주는 사랑의 전이(轉移), 즉 배려가 수반된다. 배려 없는 사랑은 있을 수가 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다.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배려가 필요하고,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반드시 수반되는 배려이지만 이 역시 과하면 하지 않느니 보다 못하게 된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아들을 볼 때마다 '이제 오지 마라'라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한마디. 세상에 제 자식 보고 싶지 않은 부모 어디 있으며 찾아오는데 기쁘지 않은 부모 어디 있으랴. 하지만 자식을 향하는 사랑의 방식, 즉 휴일에는 집에서 편히 쉬어라는 뜻의 배려가 '이제 오지 마라'이다. 이 말 듣는 아들이 고맙다고 느낄까. 아니다. 부모는 사랑의 마음으로 배려한다고 한 말이지만 듣는 이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한테 오지마라니. 자꾸 들으면 화가 난다. 지나친 배려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배려는 '천천히 다녀라' '잠 오면 쉬었다 오너라' '그렇게 오고 싶거든 한 주 걸러서 오너라'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과하지 않은 배려가 아닐까 싶다.
님이 그리워 항상 보고 싶지만 거리 문제로 여의치 않아 하루 걸러 하루, 퇴근길에 님을 보러 밤길을 가는 남자. 어느 날 님이 피곤할 것을 염려, 느닷없이 '이제 일주일에 한 번만 와'라고 한 여자가 있었다면 이게 남자를 향한 사랑의 배려일까. 아니다. 상대의 의사를 전혀 생각지 않은 자신만의 사랑의 배려이다. 상대는 피곤함보다 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기에, 그 '간절함'이 '피곤'보다 더 커기에 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상대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그리움을 짓밟는,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상대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크나큰 상처를 주는 말이다. 지금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자신만의 잘못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를 위한 진짜 좋은 배려는 무엇일까. '피곤한데도 날 만나러 오니 너무 고마워' '피곤할 덴데 우리 중간에서 만날까' 이런 표현이 밤 길 찾아오는 상대를 위한 배려의 말이다.
이미 계획된 발표 준비로 걱정하는 이에게 '왜 그런 발표를 한다고 해서 고생을 사서 하냐'라고 하는, 보고 있자니 딱해서 나름 배려라고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 역시 상대를 죽이는 말이다. 이런류의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더 좋다. 직접 도와줄 수 없을 땐 따뜻한 말의 격려가 곧 배려다. '힘들지만 준비해서 발표하면 그만큼 보람이 있을 거야' '좋은 기회인데 힘들여 준비한 만큼 성취감도 있을 거야'. 이런 말을 상대는 듣고 싶어 할 것이고, 이런 말이야 말로 상대에게 힘을 주는 배려의 말이다.
계약하나 해 달라며 부탁을 하는 영업직의 지인에게 '힘든데 이런 일 하지 말고 다른 일 찾아보는 게 좋지 않나'라고 하면 이것이 배려일까? 상대가 만족할 만한 직업을 알선해 주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지금 영업 직원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상대가 되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배려이다. 천 마디 다른 말 보다 실적하나 올려주는 것이 배려임을 모르진 않을 텐데.
지나친 배려, 상대의 반응으로 자신도 알고 있다. 그 반응을 보고 충분히 배려의 수위를 조절을 할 수 있음에도 고집인지 아집인지 그것이 자연스러워인지 편해서 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성격인지 잘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배려는 적당했을 때 상대가 사랑이라고 느낀다. 지나친 배려로 상대가 힘들다면 그것은 배려가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도 상대도 만족하는 것이다. 과유불급, 지나친 배려는 절대 사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