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준영이는 낭떠러지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소리치듯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준영이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인 명애의 아들이자 작년에 내 교양 영어 수업을 들은 제자이기도 하다. 같은 과목을 수강하던 연숙이를 열렬하게 쫓아다녔지만 예쁘고 새침한 연숙이가 마음을 열지 않아 안타까워하더니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연숙이도 준영이의 구애에 감동받아 소위 말하는 컴퍼스 커플이 되었고 가끔씩 손잡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영작 숙제를 내주면 그저 짧은 문장 몇 개로 때우던 준영이가 몇 장에 걸쳐 쓴 편지를 읽으며 조금은 전통적인 ‘사랑의 증세’에 살며시 미소 짓다가 그냥 지나치는 사랑의 열병으로 치기에는 묘사가 너무 절박해서 나도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사실 나는 준영이가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잊을만하면 가끔씩 소식을 주는 명애에게서 아들의 실연에 대해 짤막한 이메일이 왔었기 때문이다.
명예는 ‘실연당한 자식을 보는 게 이렇게 괴로울 줄은 몰랐단다 저 싫다고 떠난 여자애를 생각하며 밥을 남기는 못난 자식이 너무나 밉고 그래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또 너무나 마음이 아프단다. '사랑을 버린 죄'에 대한 벌이 이렇게 혹독할 줄이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도 가끔씩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나고 미안한 생각이 든다’라고 쓰고 있었다
‘사랑을 버린 죄’ - 하도 오래전이라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명애는 준영 아빠와 결혼하기 전에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던 어떤 남학생과 열렬하게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명애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그 남자 친구와 결별하고 소위 조건이 좋은 준영 아빠랑 결혼했고, 그 남자 친구는 배반의 상처가 너무나 깊어서 자살소동까지 벌였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알고 보니 아들 준영이가 목숨 걸고 좋아하는 연숙이는 명애에게 버림받고 나서 독일로 유학 간 이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옛 남자 친구의 딸이더라는 것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믿기지 않고 무슨 TV 연속극에나 나옴직한 이야기지만 나는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듯, 매정하게 끊었던 사랑이 먼 훗날 어떤 인연으로 연결되어 다시 부딪히고 그 마침표는 쉼표, 느낌표로 변하여 문장은 다시 계속되고… 물론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지만, 과거의 사랑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죄나 벌을 떠올려야 하는 명애가 가슴 아팠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사랑을 버린 죄’는 마치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돌을 달아 놓은 듯, 가끔씩 마음을 흔들어 놓는 무게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