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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그리고 응어리

배트맨 조커 안에 시 있다

by 처용 김은

응어리


상자 안에 넣어둔 접질러진 종이 하나가 운다


흥건한 상자가 가슴의 문을 열자


눅눅한 창문에 나라는 사람이 새겨진다


김 서린 손가락으로 한 글자 서툴게 남기니


이번엔 나라는 글자 하나가 줄줄 흘러 운다


내 책 속 곰팡이를 향수병에 모두 담아


낡은 품에 뿌리는 족족 난


동화 속 아이처럼 하염없이 착하게 누그러진다


타다 남은 촛불 하나 생경하게 당겨진 시큰한 밤,


방이란 상자에 담겨 가슴을 톡 접질린 내가


축축한 얼굴로 그 미운 종이를 펴면서


천년 별빛을 타고 흐르고 또 흐른다


멸종하지 않는 바다거품처럼


멍울지는 이 더운 시간 속에



김은 / 제27회 근로자문화예술제 대상 수상작


항상 시를 쓸 때면 어둠을 생각했던 것 같네요. 아니, 저도 모르게 어둠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배트맨을 참 좋아합니다. 캣우먼도 좋아합니다. 그들의 검은 의상, 검은 행동, 검은 몸짓, 검은 도시가 매력적입니다. 담. 그 도시의 축축함과 우울함이 뭔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그리움 같기도 하고 동경 비슷해요. 특히 [배트맨2]팀 버튼, 캣우먼, 펭귄맨 등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제 머리에 화살처럼 꽂혔습니다. 그때부터 팀 버튼 감독의 작품을 많이 찾아봤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하게 되었어요. 배트맨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배트맨의 고뇌, 그의 아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극한 외로움. 이후, 히스 레저가 분한 새로운 조커도 등장했습니다. 그를 보면서 엄청나고 무한한 우울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화장도 미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검게 번져버린 눈매, 발갛게 찢어진 입, 아름다운데 슬프고 너무 가엾고 잔인했습니다. 찢어진 얼굴은 에드워드를, 기워진 캣우먼의 의상을, 크리스마스 악몽의 샐리 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에게는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펭귄맨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 같았습니다. 펭귄맨에게도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들이 저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파괴'가 '글을 짓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만화 [천사금렵구]베리알이 그런 존재였고, 어렸던 저는 베리알의 대사를 다이어리에 적곤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배트맨을 소재로 한 시를 쓴 있었는데요, 나중에 올려보겠습니다) 조커, 펭귄맨, 캣우먼, 에드워드 등에 관한 시도 언젠간 써보려 합니다. 시 소재로 이상하다는 분도 있었는데, 뭐, 그거야 쓰는 제 마음이니까요. :) 그들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시로 옮겨보고 싶습니다.




위의 시 [응어리]도 그냥 스프링노트에 연필로 쓱싹쓱싹 끄적여놨다가 북 찢어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오래 전에 만든 비공개 카페에 그때그때 적어놓긴 하는데(날짜와 시간도 보관되니 좋죠), 스무 살 즈음에는 노트에 적어놔야 할 것 같았고, 그게 뭔가 더 폼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건 좀 문예창작과스럽거든요. 신승훈 씨가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이 말을 했었습니다. 음악이 팍 떠올라서 음을 흥얼거리다가, 좋다, 싶으면 삐삐에 흥얼거림을 녹음해두었다가 꺼내 작업을 한다고요. 저도 문득 길을 가다가 밥을 먹다가 뭔가를 하다가 문득 시구절이나 음악이 떠오르긴 하는데, 아, 나중에 또 떠오를 거야, 하고 놔두었다가 다시 애를 써봐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냥 날려먹은 거죠. 그럴땐 절대 생각 안 납니다. 제가 저한테 문자라도 보내야겠어요. 가끔 그러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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