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외출

까치랑 지렁이랑 개미랑

by 꽃무릇

'어젯밤엔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며칠 동안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화단의 흙이 너무 뜨거웠거든요.

사람들도 더운 여름밤엔 열대야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나도 어젯밤엔 열대야였었던 것 같아요.

너무 더워서 잠을 잘 수도 없고, 흙위로 고개를 내밀어봐도

물기라고는 한 방울도 없었어요.


한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어요.

오늘은 비가 와야 할 텐데...

어느새 풀숲 위로 보이는 하늘이 환해지고

저 멀리 운동장 옆 기숙사 방엔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누나, 형아들의 새벽운동이 시작될 거예요.

누나, 형아들은 새벽에도 뛰고 밤에도 뛰고 그래요.


밤새 열대야로 잠을 설쳐서인지 기다란 내 몸은 축축 늘어졌고

피부도 말라 건조해져서 정말 너무 아팠어요.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땅속이 건조해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쓸리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때,

후드득후드득하면서 비가 오기 시작하지 뭐예요.

나는 최대한 빠른 몸짓으로 땅 위로 올라가서는 온몸을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비에 적시기 시작했어요.

옆 친구들도 모두 신이 나서 꿈틀꿈틀하고 있더군요.


'며칠 전 죽은 내 친구 생각이 났어요. '


비가 온 뒤 운동장 구경을 나갔다가 미처 돌아오지 못한 그 친구는

뜨거운 햇볕아래 트랙 위에서 말라죽고 말았어요.

친구의 몸은 마른 가지처럼 뻣뻣해진 채 트랙 위에 누워있었는데,

어느샌가 나타난 개미란 놈이 친구의 몸통을 질질 끌고 가는 게 보였습니다.

개미는 자기 몸의 몇십 배나 되는 친구를 혼자서 끌고 갔어요.

화단을 넘어 멀리 나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지만...

비가 많이 오거나 하면 마른 트랙 위로 나가고 싶어 지곤 했어요.


'잠깐만 보고 오면 되지 않을까?'


빨간 트랙은 내가 사는 땅속 하곤 달라 보였어요.

스펀지처럼 폭신폭신해 보이고 보드랍기까지 했어요.

그 트랙 위를 달리는 누나 형아들을 올려다볼 땐 나도 정말 신이 났답니다.

' 잠깐 나가보고 후다닥 오면 괜찮을 거야'


운동장 트랙이 궁금한 지렁이

'나는 열심히 배를 밀어 트랙으로 나갔어요'


아침에 내린 비로 트랙은 촉촉이 젖어있었어요.

잠깐만 보고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에 걱정도 잠시 내려놓았고요.

친구생각을 잠깐 했지만 아마도 친구는 멀리 나가서 그랬을 거예요.


'그때였어요.'

머리 위가 잠시 어두워졌어요.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물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 사람은,

들고 있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내 배 쪽으로 쑥 밀어 넣고서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렸어요.

나는 미끄덩하고 트랙 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팠지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꿈틀대었어요.

그 순간 그 사람이 나를 다시 한번 들어 올리더니 풀숲으로 휙 하니 던져버렸습니다.

쿵하고 풀숲으로 곤두박질쳐진 나는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있었어요.




하얀 싱크대 하단에 옥수수알만 한 것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투명한 자주색을 띠고 있는 작은 거미였다.

'뜬금없이 웬 거미가 여기 매달려 있는 거지?'

살그머니 휴지를 갖다 대니, 놀란 거미가 모든 다리를 쫘악 피고는 도망갈 태세를 취한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는 죽은 척하느라 몸을 모았었던 것이었다.


'걱정 마 난 너를 살려줄 거야'


베란다 창을 열고 거미를 날려 보냈다.

'아래 화단 나뭇가지에 내려앉겠지' 하면서 말이다.

언제부턴가 길을 가다가 개미를 보면 행여라도 밟을까 슬그머니 옆으로 비껴간다.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눌러 죽이던 하루살이를 누르지 못하고 살려주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이다.

내가 그렇게 안 해도 어차피 하루면 갈 애들을 생각하니 불쌍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루면 갈 생이니 나랑 연배도 비슷할 것도 같아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면 모두가 웃을 일일까?

해로움을 주는 해충이 아니라면 그냥 뭐가 되었든 다 살려주고 싶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친구'


한바탕 비가 내린 아침.

오전에 운동장 빨간 트랙을 걷노라면 여기저기 지렁이들이 수도 없이 보인다.

화단을 넘어 트랙으로 탈출을 시도한 지렁이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그동안 보아온 나는,

가장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쥐어 들고 보이는 대로 지렁이를 화단으로 옮겨 주었다.


"이놈아 나오지 마라. 말라죽는다니까!"


내 손으로 한뼘도 안되는 거리가 이들의 생과사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하니

가던길 쉬고 쭈그리고 앉는것이 무슨 수고인가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화단 저 멀리 안쪽에다 지렁이를 내려놓는다.

힘들어서라도 다시는 나오지 말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엄마가 잔소리로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매를 번다 매를 벌어. 똑같은 소리를 맨날해도 어째 그러냐"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지"


나도 화단을 보고 이야기 해볼까?

"얘들아 다 너희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하긴 뭐,

'위험한 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인간의 무지도 있으니 할 말은 없지만서도.'



파란잔디 위 까치


비가 온 뒤의 풍경은 늘 똑같다.

촉촉해진 풀 숲 사이에서 비집고 나오는 지렁이들과

운동장 한가운데 잔디밭에서 젖은 땅 위로 올라온 지렁이들을 잡느라 바쁜 까치들.

까치들은 입에 벌레를 문채 어디로 가는 걸까? 새끼들에게 먹이려고 연신 바쁜 건 아닐까?

햇살에 말라죽은 지렁이를 끌고 가는 바쁜 일개미들은 또 어떤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시간'


녹색 천연잔디 운동장과 그 운동장을 감싸고도는 빨간 트랙은

그 색의 대비도 매우 역동적이지만,

새벽부터 밤늦도록 그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두의 숨결로 채워져 있었다.


작은 생명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때로는 사랑스럽고, 또 때로는 고귀함마저 느껴진다.

잔디밭에 꽃꽂이 서있는 토끼풀만 해도 그렇다.

비록 작고 여리지만 아주 당당하게 허리를 고추 세우고 있다.

키 작은 노란 민들레를 들여다볼 때도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생명은 어느 것 하나 보잘것없는 것이 없구나....

그 무엇도 허트로 만드신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저 놀라움이 앞설 뿐이다.

곧 장마가 시작되겠지...

모두가 별탈없이 지나야 할텐데... 하고 마음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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