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알기란 쉽지 않지.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내 살림보따리를 열었다.
선반 젤 위칸 가장 깊숙한 곳에 커다란 상자들이 몇 개 있는데, 나의 추억이 가득한 그 보따리 안에는 고운 색의 천들이 종류별로 한가득 들어있다.
아이들이 한창 클 때 아이들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혀보고 싶은 욕심에 조그만 가정용 미싱을 산 것을 시작으로 그 범위가 점점 확대되더니, 홈패션까지 만들고 싶어 결국엔 중고 모터 미싱까지 집안에 들이고 말았다.
취미로 잠깐 배우려던 것이 실력이 늘어 하나씩 만들다 보니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주변사람들의 주문에 예정에도 없던 부업도 했다. 그러던 중에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자 혼수로 필요한 침대세트. 이불커버를 직접 만들어 보자 맘먹고 도전을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천만 보면 욕심이 생겨서 이쁜 천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일단 사 모으고, 더러는 사용하고 남은 채로 또 더러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그 상자 안에 가득한 것이다.
그중에 특히 퀼트를 할 때 수집했던 천은 염색이 아주 고급지고 예뻐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꺼내어 집을
꾸미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초록색 트리에 빨간 양말과 하얀 솜을 달고 나무꼭대기에는 금색별을 얹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바느질하는 엄마 곁에서 배를 깔고 누워 학습지를 풀던 아이들의 모습도 떠오르고, 여름햇빛을 가린다고 길게 늘어트린 거실의 바다색 커튼도 생각난다.
노란 오리가 그려져 있는 천으로 아이들의 여름 반바지를 만들어 입히고, 퀼트로 만든 곰돌이 배낭을 하나씩 메어주던 기억, 교회 유년부 아이들에게 예쁜 캐릭터가 그려있는 보조가방을 만들어 나누어주고, 구역식구들에게 꽃무늬 앞치마를 하나씩 선물했던 일들.
지지미 원단의 여름원피스를 받아 들고 좋아라 하던 친구딸내미는 그때 이야기를 지금도 가끔 한다고 한다.
지나고 나서야 그 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행복했던 시간인지 알게 된다.
작은 수고로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전달했던 아름다운 기억들.
모두들 "지나고 나면 그때가 좋았다고 느낄 거다"라고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스스로 겪지 않으면 모두 지나가는 바람소리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사실 그때의 감동은 그때여서 가능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옷걸이에 걸어놓은 하얀 면치마 아래쪽에 누렇게 얼룩이 묻어있다. 그냥 입자니 보기 흉하고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예쁜 조각그림을 덧대어 살짝 꿰매주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상자를 꺼내어 한참을 뒤적거려 들꽃이 그려져 있는 천 조각 하나와 파란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천을 꺼냈다'
"치마에 꽃잎천을 덧대어 꿰매고,
파란색 앞치마를 하나 만들어봐야겠어."
"붉은 꽃이 그려져 있는 앞치마는 왠지 더 더운 것 같다니까"
오랜만에 살림보따리를 들여다보며 젊었던 나의 모습과 개구쟁이 아이들의 모습, 지금은 안부조차 건넬 수 없는 그때의 인연들을 떠올려 본다.
지그시 눈을 감고 떠올려보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귀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먼 후일 오늘이 추억이 되는 그날을 위해,
이 하루를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게 채워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숙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