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끼리 책 모임(《작은 도서관》)을 6개월 정도 하니 모임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 집에 온 아이는 “오늘은 ○○가 진짜 멋진 생각을 얘기했어요.”, “○○가 진행을 진짜 잘했어요.”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자기가 진행한 날은 , “친구들은 자기 경험 얘기하는 걸 제일 좋아하더라고요.”, “엄마, 애들이 딴소리를 막 했는데, 내가 질문으로 돌아오자고 얘기해서 책 이야기 잘 나눴어요.”라면서 엄지를 척 세워 보였다. 모임이 잘되지 않아도 아이는 전처럼 속상해하지 않고,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다음에는 잘 될 거예요.” 했다. 아이들이 골라 읽은 책 목록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푸른 사자 와니니>, <몽실언니>, <불량한 자전거 여행>, <우리말 모으기 대작전 말모이>, <책과 노니는 집> 등 우리나라 동화도 많이 읽었고, <시골 의사 박경철의 아름다운 동행>,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 <파브르 곤충기> 등 비문학도 챙겨 읽었다.
소녀들의 책 수다를 꿈꾸다.
그런데 5학년이 되자 아이에게 신체적·정신적 변화가 찾아왔다. 몸이 변하면서 감정도 따라 요동쳤다. 외모에 관심이 많아졌고, 남자 친구보다는 여자 친구와 어울리는 걸 더 편하게 여겼다. 아이는 소녀 감성을 만족시켜줄 책을 읽고, 여자들만 아는 이야기를 실컷 나누길 원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빨간 머리 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같은 책이 떠올랐다. 아기자기한 배경,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 나오는 소녀들의 이야기. 아이는 그런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이해하고, 친구들과 자신의 감정을 공유하며 힘을 얻을 거였다. 때마침 아이들이 고전을 좀 읽었으면 하고 바라던 터라 소녀들끼리 고전을 읽는 모임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고전 문체는 낯설고, 그 의미를 깊이 헤아리기 어렵다. 결국 내가 또 이끔이 역할을 자처했다.
소녀들의 책 모임《소녀들의 명작읽기》
그렇게 해서 2주에 한 번씩, 소녀들끼리 모여 명작을 읽는 모임 《소녀들의 명작읽기》를 시작했다. 이 모임은 내가 모든 걸 결정한다. 나 혼자 책을 정하고, 아이들이 생각해봤으면 하는 질문을 정리한다. 진행도 내가 한다. 모임 준비를 위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고, 모임을 잘 이끌어야 하는 부담감도 크다. 하지만 우리 아이에게 좋은 책을 골라 권할 수 있고, 내가 의도하는 대로 아이들의 생각 나눔을 이끌어갈 수 있다. 집에서 아이에게 아무리 좋은 책을 권하고, 아무리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줘도 아이는 잔소리로 들을 뿐이다. 책 모임에서는 똑같은 얘기를 해도 아이가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르다. 엄마가 친구들 모두에게 건네는 따스한 조언으로 여긴다. 이렇게 《소녀들의 명작읽기》는 아이의 요구와 엄마의 욕구를 바탕으로 시작된 모임이다.
처음 읽은 책은 비룡소에서 나온 <피터팬>이다. 누구나 알지만, 원작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이야기 중 하나다. 책보다는 애니메이션이 유명하고, 아이들도 주요 인물이나 주요 사건은 알고 있지만 원작은 모르고 있었다. 《소녀들의 명작읽기》에서는 여기저기서 자주 언급되고, 다양한 장르로 변형되어 즐기는 이야기들을 원작으로 읽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터팬>을 처음 읽은 아이들은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시간과 공간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럽다.”, “자주 읽어본 말투(문체)가 아니라 잘 읽히지 않는다."고 엄살을 부렸다. 고전은 여백이 많다. 독자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숨겨진 의미를 스스로 채워가며 자기만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아이들은 그동안 읽기 쉽게 잘 쓰인 책을 주로 읽어왔으니 고전 읽기가 낯선 건 당연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함께 읽기
하지만 아이들은 고전 문체에 금방 적응했다. <피터팬>을 읽고, 이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을 때는 아이들이 훨씬 편안해했다. 우리 아이는 책 읽은 후 영화도 챙겨 봤는데, 영화보다 책이 더 재미있다며 "책 읽고 내 마음대로 상상하는 게 훨씬 좋아요."라고 했다. 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자기는 정말 좋다며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지금도 아이는 책장에 꽂힌 책을 볼 때마다 "이거 내가 진짜 좋아하는 책이다! "한다. 이렇게 혼자 재미있게 읽은 책으로 모임 하면 아이가 이야기를 풍성하게 꺼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비룡소)
별점 주기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나누기
우리 아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5점(5점 만점)을 줬다. 3점과 4점을 준 친구들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자꾸 일어나니 재미있고, 다음 이야기가 무엇일까 기대된다고 했다. 다만 여러 인물이 나오고, 사건이 빨리 전환되어 기억하기 어렵다는 건 단점으로 꼽았다. 그런 ' 이상한 ' 점이 이 이야기의 매력이란 걸 아이들이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나는 “왜 앨리스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까?”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어디로 가고, 누군가를 만나야 새로운 사건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앨리스는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길이 나타나면 가본다, 이야기의 결말을 보아 앨리스는 꿈을 꾼 것이다, 엄청 생생한 꿈을 꾼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상한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르다. 아이들과 꿈의 특성을 더 살펴봤다. 아이들은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한참 나누며, 꿈에서는 갑자기 장소가 바뀌고, 맥락 없이 인물이나 사건이 바뀐다는 걸 찾아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런 꿈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나눴다. 이상한 나라는 이상하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이게 왜 이래? 잘못된 것 아니야?’하는 판단을 보류하고 앨리스를 따라 무작정 읽어 가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내가 앨리스라면 흰 토끼를 따라갈까? 따라가지 않을까?
아이들은 '내가 만약에~라면’을 넣어 만든 질문을 좋아한다.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 마음껏 상상한다. 정답도 없고, 뭘 생각해도 내 마음이니 신나서 떠든다. 앨리스는 시계를 찬 흰 토끼를 따라갔기 때문에 이상한 나라에 가게 됐다. 생활 범위가 좁고, 정해진 틀 안에서 생활하는 우리 아이들이라면 어땠을까? 기꺼이 흰 토끼를 따라가서 모험을 즐길까? 아이들 중 반은 따라간다고 했고, 반은 따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따라간다고 답한 아이들도 ‘어치피 꿈이니까’, ‘꿈이 아니라면 위험하니까 따라가지 않겠다.’ 했으니 결국 모두가 따라가지 않는다고 답한 것과 다름없다. 아이들은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경험을 하는 건 두렵다고 했다. 정해진대로, 익숙한 곳에서 예측 가능한 생활을 하는 걸 선호했다. 부모의 보호 아래 수동적으로 생활하는 아이들이라 그런가 싶어 씁쓸했다. 아이가 집 밖 세상을 궁금해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를 기꺼이 탐험하려는 마음을 잃게 만든 게 나란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이상한 나라, 이상한 인물들
예전에 동네 엄마들끼리 <이상한 앨리스>를 읽은 적이 있다. 엄마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지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하며 아이들보다 더 혼란스러워했다. 딱 한 엄마가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다는 거였다. 그녀는 평소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아!”하고 깨달은 게 있는데, 이 책을 즐기지 못하는 건 내가 너무 정답에 얽매여 답답하게 살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원인과 결과로 딱 맞아떨어지고,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삶. 그런 내 삶에는 우연과 상상이 결핍되어 있었다.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이 요동치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상한 나라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거였다.
<이상한 앨리스>는 아이들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아지는, 이상한 게 이상하지 않아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 줬다. 웃음만 남기고 몸이 사라지는 체셔 고양이, 비정상적인 티타임을 갖는 모자 장수, 먹으면 몸이 커지고 작아지는 버섯, 말하는 애벌레, …. 나는 우리 아이는 그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엄마처럼 되지 말고. 어른이 되어서도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 모임 중에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앨리스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얘기했다.
• 황소고집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한다.
• 도전해보고 싶은 게 많다.
• 자기주장이 있고, 도전을 많이 한다.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 할 말은 다 한다. 도전을 많이 한다. 실패도 잘한다.
자신이 고집 세고, 할 말은 한다고 당당히 얘기하니 참 좋았다. 실패를 하더라도 도전을 한다니 다행이었다. 까르르 웃으며 자유롭게 얘기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 어른인 내가 문제야. 나만 잘하면 돼.’하고 생각했다.
“앨리스가 내 친구라면 어떨까?”
아이들은 발제문 중에서 이 질문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머뭇거리지 않고 답을 했다.
• 피곤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많이 챙겨줘야 할 것 같다.
• 현실적인 친구도 필요하다, 함께 가다가 동물이나 식물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라면 불편할 거다.
• 앨리스는 매일 지각할 거다, 나무랑 대화하느라고.
• 앨리스가 꿈에서만 이렇고 현실에서는 안 그럴 수도 있다.
• 현실에서는 앨리스가 아는 것이 많을 수 있다, 이상한 나라에 와서 이상하게 된 거다.
앨리스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한 아이가 학교에서는 규칙과 규율이 있어 자기 본래 모습대로 지낼 수 없다고 운을 뗐다. 그러자 나머지 아이들도 “학교에서는 모범생인 척해야 해요.”, “학교에는 어른들이 만든 규칙이 있어요.", “내겐 학교 밖이 이상한 나라이고, 마음대로 이것저것 해볼 수 있어요.” 했다. 어쩌면 아이들 모두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데, 어른들이 만든 틀 안에 넣어 키우는 건 아닐까. 아이들은 신나서 얘기하는데 어른인 나는 자꾸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아이가 “오, 그러고 보니 피터팬이랑 앨리스랑 친구 하면 되겠다.” 했다. 다 같이 한바탕 웃고 나서야 나도 다시 입을 뗄 수 있었다.
앨리스는 어떤 어른이 될까?
앨리스는 상상의 세계로 기꺼이 모험을 떠나며, 낯선 사람(혹은 동물)과도 금방 이야기를 나눈다. 이상한 일이 막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는다. 이런 앨리스는 어른이 되어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 아이들은 동물과 대화하는 사육사, 판타지 이야기에 그림 그려주는 사람,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가,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주는 상담사라고 했다. 한 사람이 얘기할 때마다 아이들은 “오, 정말 잘 어울린다.”, “맞아. 맞아.”하며 공감했다. 마치 앨리스가 실제로 자주 만나는 친구인 것 같았다. 손뼉을 치고, 서로 눈 마주치며 웃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이가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을 꿈꾸고, 살아가며 만날 ‘이상한’ 친구들에게 언제든 마음을 활짝 여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아이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제 생각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고전 읽기가 어렵다, 잘 읽히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발제문 따라 이야기를 나누니 아이들은 신이 나서 얘기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뒤늦게 이야기의 재미를 깨닫고, 무심코 지나친 장면을 다시 찾아 읽기도 했다. 이야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기억에 남는 인물을 이야기 나누며 ‘이상한 나라’의 특징을 잘 찾아냈다. 교훈, 규칙, 질서 따위가 없는 ‘이상한 나라’에서는 마음 가는 대로 모험하고 즐길 수 있다는 걸 아이들은 안다.
내 안의 앨리스 발견하기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자신 안에서 앨리스를 발견한 것이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이것저것 겁내지 않고 새로운 길을 나서서 낯선 인물들을 만나며 하는 모험. 그러한 모험을 자신들도 해볼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이번 책모임은 아이들이 앨리스, 애벌레, 토끼, 고양이, 모자 장수 등과 함께 이상한 나라 여행을 즐겁게 했다. 지켜보는 내내 나도 즐겁고 신이 났다. 내 안의 앨리스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괜히 마음이 울적해져서 얼른 생각을 그만두었다. 아이들은 오래도록 자기 안의 앨리스와 이상한 나라를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엄마인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