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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Jan 22. 2021

25. 작은 영웅들의 큰 이야기_워터십 다운(1)

- 책 모임《소녀들의 명작읽기》이야기

“토끼의 일생인데 사람의 일생을 본 것 같다.”

“우리 집에서 토끼 열한 마리를 직접 키운 것 같이 생생하다.”

“너무 재미있어서 두 번 읽었다.”

“읽은 것 중 제일 재미있었다.”


모임 시작 전부터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신이 나서 떠든다. 자신의 책 읽기가 어땠는지, 어떤 인물이 마음에 들었는지를 어서 말하고 싶다며 흥분했다. 아이들의 칭찬 세례를 받는 이 책은 바로 <워터십 다운>이다. 간단히 말하면, 샌들포드를 떠나 새로 살 곳을 찾아 나선 토끼들의 모험 이야기다. 토끼들은 불길한 예언 때문에 샌들포드를 떠난다.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하고, 토끼들은 온갖 위험에 빠진다. 마침내 열한 마리의 토끼들은 새로운 땅에 도착해서, 자기 무리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굉장한 서사와 비유 그리고 상징이 가득한 고전이다.


  1971년 영국에서 ‘Watership Down'이 처음 출간됐을 때 5백만 부 이상 팔렸다. 여러 문학상을 석권하면서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원래 사계절 출판사에서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라는 제목으로  1권짜리 책으로 나왔는데, 이후 낱권 4권짜리 시리즈로 바뀌었다. 같은 이름의 TV 시리즈가 나온 뒤에는  새 표지를 입힌 한 권짜리 <워터십 다운>도 출간됐다. 《소녀들의 명작 읽기》에서는 각자 편한 판본을 선택해서 읽기로 했는데, 아이들은 합본된 책을 더 좋아했다. 낱권이 휴대하기는 편하지만 앞뒤 이야기를 바로 살펴보기가 불편하다. 내 경험상으로도 합본된 책으로 읽는 게 좋았다. 책을 읽어가며 나의 책 읽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완독 후 “이 책을 내가 읽었다니!”하는 성취감도 크게 느낀다. 하지만 책 읽기 경험이 적고, 책 분량에 부담을 크게 느낀다면 낱권으로 하나씩 읽으며 성공 경험을 쌓아가는 게 좋다.

총 4권으로 되어 있는 시리즈

  우리 아이들 대부분은 한 권짜리 <워터십 다운>을 준비했다. 한 번에 다 읽지 않고, 제1부부터 4부까지를 두 달 동안 읽었다. 2주에 한 부씩 읽고 모여 이야기 나눴다. 어떤 책이든 처음 만나면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껴진다. 이야기의 배경과 인물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체에 적응도 해야 하니 조금은 ‘견디면서’ 읽어야 한다. <워터십 다운>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은 토끼 특유의 행동과 생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토끼가 경험하고, 토끼가 본 세상 이야기라서 처음에 읽으면 사고체계에 큰 혼란이 온다. 인간인 내가 보고,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작은 동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 주니 무척 귀한 경험이지만, 처음에는 인간인 나의 시선을 내려놓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책에는 토끼들끼리 사용하는 말이 나온다. 천적은 엘릴(elil), 지도자는 라(rah), 풀 뜨는 것은 실플레이(silflay), 똥은 흐라카(hraka) 등. 이와 같은 토끼어는 막 책 읽기를 시작했을 때는 장애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제1부를 지나 2부 읽기에 들어가면 모든 게 나아진다. 토끼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문체나 서사 구조에 적응해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책 모임 아이들도 제1부 읽기는 어려워했지만, 2부부터는 마치 자신이 토끼인양 각 장면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리며 읽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경쾌하고 힘차게 책 읽기를 해나갔다. 깔깔 대고, 깜짝 놀라고, 감동하면서.

760쪽 분량의 합본책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


 <워터십 다운>에는 개성 넘치는 토끼들이 등장한다. 샌들포드에 드리운 위험을 감지하는 예언자 파이버, 토끼 무리를 이끌고 모험을 떠나는 헤이즐, 토끼 신화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댄더라이언, 아는 것이 많고 지혜로운 블랙베리,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빅윅 등. 다양한 성격과 매력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인물을 주제로 책 대화를 나눠도 좋다. “나랑 닮은 인물은 누구일까?”, “내 친구와 닮은 인물은 누구일까?”, “내가 닮고 싶은 인물은 누구일까?”, “〇〇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처럼 인물로 나눌 이야기가 많다.  


질문] 나와 가장 닮은 인물은 누구니?


 “나는 댄더라이언이랑 빅윅이 섞인 것 같아요. 힘이 셀 때도 있고 이야기도 잘하거든요. 파이버의 예언 능력을 갖고 싶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싶어요.”

“ 나는 파이버를 닮았어요. 뭔가를 예측하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블랙베리의 논리성을 닮고 싶어요. 엄마랑 말싸움할 때 기선 제압하게요.”

“나는 블랙베리랑 파이버를 닮은 것 같아요. 친구들을 잘 챙겨주거든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하는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빅윅의 힘을 갖고 싶어요.”


질문] 가장 인상적인(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니?


  각 부마다 일어나는 사건, 활약하는 인물이 다양하다. 같은 질문을 해도 모임 때마다 매번 다른 답이 나온다. 제2부에서는 1부의 샌들포드에 남았던 홀리가 상처를 입고 등장하고,  헤이즐이 친구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농장에서 길러지는 암토끼들을 구하러 간다. 헤이즐이 위험에 처해 죽을 뻔한다. 때문에 아이들은 헤이즐, 홀리에 집중했다.


 “ 헤이즐이요. 암토끼를 구하러 간 용기가 인상 깊어요.”

 “ 홀리요. 샌들포드 마을에 살다가 워터십으로 왔어요. 친구들이 홀리를 잘 도와줬어요. 마치 원래 이 무리(헤이즐 일행)였던 것처럼 잘 지내서 기억에 남아요.”

 “ 헤이즐은 마지막에 반전이 나와서 기억에 남고, 홀리는 파이버의 예언이 맞다는 걸 증명해준 인물이라 인상 깊어요. 헤이들이 홀리를 많이 믿는 것 같아요.”

 “ 헤이즐이 죽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생각했는데, 살아있었어요.”


 이렇게 각 부마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 이 이야기에서는 영웅 한 명을 돋보이게 하지 않는구나.’하는 걸 알게 된다. 제4부에 이르면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토끼들이 다 영웅이에요!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아이들은 인물 각자가 가진 장점이 다르기 때문에 무리 지어 다녀야 한다고 했다. 헤이즐이 다른 토끼들의 장점(지력, 체력, 예언 능력 등)을 혼자 가졌다면 폭력적인 지도자가 되었을 거라는 거다. 가벼운 책 수다가 묵직한 울림 있는 대화로 바뀌는 순간이다. ‘함께’의 의미, 공동체의 가치를 아이들 스스로 찾아냈다. <워터십 다운>을 작은 영웅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이야기로 읽으니 책 대화가 더욱 깊어졌다.


 작은 토끼들의 큰 이야기


  <워터십 다운>은 토끼들의 이야기다. 토끼는 힘없고, 작은 동물이다. 인간에게는 쉬운 일이 토끼에게는 무척 힘겹다. 샌들포드 마을을 떠난 헤이즐 일행이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워터십 다운이다. 책 앞쪽에는 토끼들의 이동 경로를 표시한 지도가 있는데,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고작 이걸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간 거야?’ 싶다.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인간이 어찌 토끼로 사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들판을 가로지르고, 강을 건널 때 토끼가 느끼는 공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종족의 멸종을 막으려고 목숨을 걸고 암컷 토끼를 찾으러 가는 수토끼의 절실함에 어찌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보면 <워터십 다운>은 작고 시시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워터십 다운>은 작은 토끼들의 아주 큰 이야기다. 토끼들의 여정에는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샌들포드 마을을 피바다로 만드는 인간, 헤이즐 일행이 만난 카우슬립 마을의 토끼들(인간에게 길들여진 토끼), 너트행어 농장에서 사육 상자에 갇혀 수동적으로 사는 토끼들, 헤이즐과 대비되는 폭군토끼 운드워트 등은 이 이야기를 단순히 토끼들의 모험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게 한다. 거친 세상에 제 힘으로 길을 내며 나아가는 삶의 가치, 진정한 리더의 모습, 인생에 닥치는 여러 선택의 순간 등 우리 삶의 중요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토끼의 일생인데 사람의 일생 같다.”는 아이의 말이 꼭 들어맞는다.


  뿐만 아니라 댄더라이언이란 인물에 주목하면 또 다른 거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댄더라이언은 이야기꾼이다. 헤이즐 일행이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토끼 영웅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종의 토끼 신화이다. 도전, 용기, 희망이 담긴 영웅의 이야기는 헤이즐 일행이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고, 고난을 극복할 힘을 준다.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공유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댄더라이언을 보면서 그림책 <프레드릭>의 이야기꾼 프레드릭을 떠올리기도 했다. 추운 겨울 배고픔에 지친 생쥐들에게 따스한 햇살이 담긴 이야기를 해주는 프레드릭. 댄더라이언은 프레드릭이 했듯이 토끼 일행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야기의 힘이다.


<워터십 다운> 함께, 천천히 읽기


   <워터십 다운> 제2부로 이야기 나눈 날, 아이들은 책 모임을 마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친구들이랑 생각을 나누는 게 좋다. 친구랑 토끼 캐릭터가 겹쳐서 생각나서 너무 재밌다.

• 책에 나온 사건에 대해 찬성/반대로 얘기한 게 새롭고,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다. 친구들 닮은 인물이 많이 나와서 재미있었다.

• 혼자 읽을 때 뭔 이야기인지 몰라서 재미가 없었다. 책 모임을 하면 모르는 것도 알게 된다. 다른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서 막 생각이 많이 났다.

• 이 책에 대한 공감지수가 올라가는 느낌이다. 친구들이 다 다르게 생각해서, 내가 모르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워터십 다운>은 작은 영웅들의 큰 이야기였고,
책 모임 덕분에 그 이야기는 우리 아이의 이야기가 됐다.  

 우리 아이가 이 책을 혼자 읽었다면 이토록 풍성하게, 즐겁게 읽어내지 못했을 거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순간 “아!”하면서 생각이 확장된다. “내 생각은 말이야.”하고 말을 꺼내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게 되고, ‘아, 이게 내 생각이구나.’하고 알게 된다.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그랬어.”하면서 책 읽는 즐거움이 한껏 부푼다. 이런 순간들 덕분에 <워터십 다운>은 아이들이 한동안 ‘책 모임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이 날 아이들은 카우슬립 마을에서 농부의 덫에 죽어간 토끼들의 죽음과 자신의 무리를 지키기 위해 너트 행어 농장으로 간 헤이즐의 죽음을 비교했다. 카우슬립 마을의 토끼들은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죽고, 그 죽음을 다른 토끼들이 쉬쉬하며 덮는다. 하지만 헤이즐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만약 헤이즐이 죽는다면 다른 토끼들이 그를 영웅으로 여길 거라 했다. 영웅의 죽음은 댄더라이언 같은 이야기꾼이 대를 이어 전할 것이다. 아이들이 그걸 찾아냈다. 이렇게 책 모임은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준다. 작은 이야기에 담긴 큰 질문에 집중하고, 그 답을 고민하게 도와준다. <워터십 다운>은 작은 영웅들의 큰 이야기였고, 책 모임 덕분에 그 이야기는 우리 아이의 이야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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