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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갑 Mar 25. 2020

안식기

몇 년 마다 돌아오는 휴식

한권의 책을 읽고 나서, 문득 일기 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사실은 몇 주 전에도 이 곳에 글을 썼었지만, 몇 일 뒤에 지웠었죠. 분노에 가득찬 글이라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많은 직장인들이 평생 안해본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나도 재택 중이다, 그러나 나는 근무를 하고 있지 않다.

프리랜서 이기때문에, 뭐라고 해야하나 무직?! 그래.. 무직이 가장 솔직한 표현일 꺼 같다.


프리랜서의 형태로 일하는 나는 프로젝트 base로 계약을 맺고 일을 하거나,

때로는 특정의 회사와 기간 계약을 맺고 일을 하곤 한다.

지난 3년정도는 특정의 회사와 연단위 계약을 맺고 소위 소속이 있는 프리랜서로서 일을 해왔다.

나의 자유분방함과 역마살을 고려하면 소속 프리랜서는 참 깝깝한 계약형태이다.

계약기간동안은 마치 나의 고삐를 회사에 쥐어준 거 마냥 프리랜서 임에도 직장인 같은 의무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단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계약서를 사인을 했었던 것은,  

그런 단점을 감수하면서도 배우고 싶었던 새로운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들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는거,

그리고 그것을 교육기관이 아닌 프로젝트를 실제 수행하면서 체득한다는 것은 뭐랄까 맨땅에 헤딩하고 스스로

진흙탕에 걸어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쌘 표현일까?

배우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참여했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몸소 경험하며 알아갈 뿐. 그것도 고객과 혈투하며.

이 단락을 빨리 마무리 해야할 꺼 같다. 이 단락이 길어지면 또 다시 몇 일 후에 이 글을 지워야 할 수 있다.


여하튼 약 3년정도의 혹독한 시간을 겪어내고 그 회사와의 계약 종료 선언을 했다.

그리고 다시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지 오늘로서 25일째다.

2월 하순경에만 해도 나는 그간 쌓인 극도의 스트레스를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일로 씻어내고자 했었다.

그래서 연이어 일을 시작해보려 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온세상이 재택근무로 강제처리되고 있었다.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도 이제 서로 만나는게 두려워지는 사태가 되었었다.

 “다음으로 연기해야 될 꺼 같아요” , “우리도 이제 재택근무 들어가요” ..

불가피하게 나에게도 온전한 백수의 시간이 주어졌다.


몇 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휴식기, 즉..안식기 이다.

긴 해외 프로젝트를 했거나, 짧더라고 연이어 몇 개의 프로젝트를 했을 경우 등..

한 템포 쉬어가야 할 타이밍이거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해야 할 때에 찾아오는 공백이다.


나는 이러한 때에 하는 것들이 있다.

   여행 : 가족들과 함께 가기도 하고, 한라산 등반같이 나홀로 떠나 자연청정에 내 육신을 씻고 오는,

   영화 : 2시간정도 깊게 몰입 하는 시간,

   책 : 역시 남의 이야기에 깊게 몰입하여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음식 : 입을 즐겁게 하는 것 만큼 행복한 치유는 없으니,

   운동 : 몸을 힘들게 하며 땀을 흘리다 보면 또 한번 뭔가 해낼 수 있을 꺼 같은 착각에 빠지지,


그러나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찾아온 안식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아이들도 학교를 못가고 집에서 무기한 기다리고 있고,

혹시나 내가 밖으로 다녀온 곳이 확진자의 동선에 포함되어 그나마 등교가 허락되었을 때 학교를 못가게 되면 안되니

나 스스로도 외출을 삼가하고 집안에서 버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책과 음식, 그리고 가끔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는 것.


몇 주전에는 조바심이 났다. 공백기가 길어지면 어쩌지. 내가 더 적극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집 밖으로는 못 나가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그러나,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코로나사태를 내 마음같이 잠재울 수도 없고,

재택근무 형태로 겨우 겨우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내 마음같이 정상화 시킬 수도 없었다.

그져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시간이다.


지난 3년을 얼마나 힘들게 달려왔는데, 겨우 이 몇 개월을 맘 편히 쉬지 않으려 했을까.

일하지 않으면 벌이가 없는 프리랜서 이지만, 지난 3년을 달려왔으니 또 앞으로 달리기 위해서 잠시 멈춰서 정비 할 수 있는 것인데.

‘왜 하필 이때 코로나!!’ 라는 원망의 생각이, ‘그래..코로나 덕분에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구나’ 로 바뀐다.

3년을 주말부부, 주말가족으로 살아 왔는데, 코로나 덕분에 온가족이 24시간 집안에 꽁꽁 뭉쳐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교도 안가고, 학원도 가지 않는다. 늦잠도 자고, 오후 늦게 씻기도 하고 아침을 건너뛰고 12시가 다되어 먹는 어떤 메뉴도 상관이 없다.

배민에 베스킨라빈스 패밀리 사이즈를 주문해서 맘껏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기도 하고,

어떤 브랜드 치킨이 맛있는지 서로 의견을 내어 주문해 먹기도 한다.

어느 때 보다 열심히 요리를 해주느라 아내의 고생이 제일 크다. 그래도 한 치의 불평없이 이 시간을 다 같이 해주는 가족들이 참 고맙다.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다. 천성적으로 넋놓고 지내는 성격은 못되어 아주 맘편히 쉬지는 않겠지만.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여건에 대해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스스로에게 주지말고

지난 3년의 노고를 씻어내고 새로운 기운으로 충전하며 새로운 국면을 기다리며 준비하려 한다.


잘 먹고 책만 읽었더니 어쩔 수 없이 몇 kg 살이 쪘지만. 뭐 어떤가, 또 열심히 뛸 수 있을 때 운동하며 줄이면 되지.

25일 동안 읽은 책의 권수가 20권이 넘어간다. 아직도 탁상에 계속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있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사진 찍어 그 위에 애플펜슬로 짧은 소감을 남기는 것이 참 재밌다.

운동을 못하니 어깨, 허리 등이 뻐끈한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 오는가 싶더니 금방 더워진다.

Fitness를 가지 못하는 것이 제일 아쉽다.


억지로라도 맘 편하게 이 안식기를 또 지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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