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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 Dec 02. 2021

대일본제국의 시작

[대일본제국 : 大日本帝國 : Empire of Japan] 의 시작

아시아의 작은 섬나라 일본이 자신들의 문화 전반을 이전시켰던 중국과 한국의 문화 영향력을 넘어 탈 아시아 국가론을 성립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국가력을 하나로 통일시켜 확장시킨 방법이 이 대일본제국이다.

일본에서는 헌법상 제국보다 황국(皇国)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제국의 주체는 일본 왕권과 그에 속한 모든 국민들에게 있다는 사탕발림을 했지만 실질적인 행정처리의 대부분은 군사정권이 실행했다고 하겠다. 이런 부분은 유럽 군부를 비롯하여 일본이 꾸준히 이어온 군사 계급이 지배 행정을 해온 형태를 그대로 이어온 것이라서 당시에는 큰 저항이 없었다.

1868년 1월 3일을 시작으로 보는 것은 국제 세계관이고, 일본 내에서는 1889년 - 메이지 22년을 황국의 시대로 문헌 정리하고 있다.

통일국가로 형성된 시간이 짧은 일본은 자국 내에서도 이 근대 제국화 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의견 충돌과 내전을 거치며 난항을 겪었는데 그 과정은 폭력에 의한 지배 형태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형식적인 구분이지만 일본 내에서 '제국(帝国)'이라는 명칭이 가진 의미보다 여전히 황국이라는 지칭에 우선권을 두고 이해하는 형태가 많다.

제국의 약탈과 침략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패퇴시킨 서구 열강에 대한 입장적 모습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영문 표기로서 엠파이어 = 제국은 상당한 의식적인 가치관을 가진 - 서구의 로마제국과 같은 형태로서 - 이해되는 과정이 많지만 실질적으로는 제3제국을 꿈꾸었던 독일 나치 정권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다.

일본 근대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국제 깡패가 되어가는 신구 서양 세력에 뒤지지 않는 힘을 기르기 위한 아시아권의 통합이라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것을 선도하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지만 동아시아 대륙의 맹주를 자처하는 중국(청나라)과 러시아,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 들어와 식민지화를 선점한 유럽 강국 간의 입김에서 자유롭지는 못 했다.

유럽 각국의 입장과 이익관계, 새롭게 부상한 미국의 세력권 확장에 의해서 아시아 전체의 식민지화에 대항하고자 하는 이해관계는 지금에 와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선도적인 개발 환경과 입장의 변화를 빠르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이 가장 약소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유산업을 비롯하여 근대산업구조로 변화해야 하는 과정에 있어서 자원이 부족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여 이 군 수뇌부는 자신들이 아시아의 식민지화 전략을 직접 강행하면서 부국강병 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든다. 단, 그 목적의 방향이 없었다.

초기에는 숭고한(?) 의식과 개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지만 방법과 논리의 방향,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질 것인지 생각하지 못한 점, 대다수의 국민들이 일부 정권 체재의 방법에 맹목적으로 따라 했을 뿐, 전체적인 의식 자각이 부족하다 보니 이런 형태를 만들게 되었다고 보게 된다.

물론 그런 형식은 이후 패전이라는 결과를 통해서 새로운 인식구조를 가지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완전히 다른, 서양식 문화를 기반으로 한 아시아 문화 확산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모습은 이후 수많은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먼저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만보 주 ▶▷▶

덩치가 큰 중국은 세대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남아있지만 공화국, 합중국이라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지역주의 의식이 강한 중화지역에서 통일된 행정과 집행 과정을 완성하기에는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한국은 세대적인 변화에 맞추어 일본과 비슷한 접촉을 했지만 무력충돌과는 다른 형태로 자주적인 변화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상당히 빠른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그에 발맞추어 빠른 결과를 내놓은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아직 근대사회에 접근할 수 있는 의학과 공공교육 시설조차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회 현실은 그 사회가 어떤 불편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개선하는 의지에서 발전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가장 큰 목적의식은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찾아내어 현실에 맞게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 인식의 변화였는데 그것을 위한 공공교육기관의 가치는 지배계급에 있어서 좋지 않다는 의식주의가 있었던 나라들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천천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사실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들을 모아서 볼 대 일본은 강제적인 무력으로 인한 통합관리를 당연하게 실천해오던 나라였고 외세의 침략이라는 공세에 맞추어 자신들이 함께 싸워나갈 방법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입장에서 논을 주장하는 것보다 무력, 근대 발전의 힘을 얻어 병기를 강화시킨 일본의 군부세력이 정치권을 강화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이 일본 제국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사무라이 계급이 서양의 기사권과 같은 구성인가라는 점을 비교하면 좀 이상하지만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숭고한 의지로 평화를 지킨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싸우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된 황국 건설, 침략에 의한 확장은 여전히 그들의 논리에 있어 정당한 세계 흐름 속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의 근대화는 이런 세계의 흐름과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된 시민의식이 없이 진행되어온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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