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I에게 연락이 또 왔다. 중심가에서 파티가 열린다는 연락이었다. I의 친화력이 얼마나 좋은지 골든레트리버의 인간 버전 같다. 만약 파티에 초대를 못 받았다면 나는 "집에서 쉴 수 있겠군"인 편이고, 걔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도 끼워줘!!"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 달랐다. 언어를 빨리 배우려면 "곧 갈게"라는 답장이 더 나았다. 원치 않게 '파뤼 피플'이 돼 버렸지만, 집에 있으면 변태 집주 말곤 대화 상대가 없으니 할 수 없다. “나 근처에 도착했어. 어디야?”라고 묻자, 그녀에게 시적인 답이 왔다. “칩코! 그냥 음악 소리를 따라와!”
I는 그런 친구였다. 내가 숙제를 당일에 끝내는 모범생이었다면, 그녀는 어학원이 끝나자마자 아무 약속 없이도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이었다. 도시의 카페, 영화관에 비치된 지역소식지 따위에서 무슨 구인 광고를 보듯이 파티 정보를 입수해내는 것이 일과였다. 만약 지면에서 정보를 못 얻은 날엔 그냥 발품을 판다. 음악 소리가 들리는 곳을 무작정 쫓아다닌다. 나도 음악 소리를 따라간 그날, 파티에서 우리는 만나자마자 춤을 췄다. 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비비 꼬듯이 움직였다. 내가 생각할 때는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도, 그다지 춤처럼 보이지도 않는 몸짓이었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목이 말라 술을 더 찾기 전까진, 그 이상하고도 섬세한 몸짓을 반복해서 추었다.
나는 그녀 덕에 보르도란 조그만 도시에서 얼마나 재밌는 행사가 자주 벌어지는지 목격했다. 어느 날엔 문득 공원에서 요가 수업이 열리고, 어느 날엔 강변에 큰 요트 파티가 열리고, 스케이트 보드를 탄 사람들이 우르르 쇼하며 행진하고, 드럼을 허리에 매단 악단이 중심가를 점령하고, 아크로바틱 댄서들이 분수대 앞에서 동전을 받을 모자를 돌리거나, 길거리에서 와인 시식회가 열리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일을 기릴 때나, 퀴어 축제가 열리는 날은 도시 전체가 왈칵 뒤집혔다. 트램도 전부 멈추고 골목골목이 전부 파티였다. 도심지의 오래된 천사 동상의 어깨며 무릎에도 젊은이들은 올라타 높은 곳의 바람을 맞았다. 그곳을 지날 땐 포도주 향과 대마 향이 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I가 자주 가는 곳은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었다. 그곳의 한 벽면은 전단으로 가득했다. 영업장에서 붙인 것이 아니고 마을 주민들이 붙인 것이었다. ‘함께 명상할 사람 구함’, ‘주말마다 고장 난 자전거 고쳐드립니다’, ‘영화 보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 등. 극장의 벽 앞에만 서면, 나처럼 연고가 없는 사람도 마을에서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강변과 가까운 성당 앞에선 주말마다 커다란 중고장터가 열렸다. 내 원룸의 세간살이는 모두 그 중고장터에서 왔다. 그 장터는 무서운 시장 동네와 인접했는데, 그런데도 내 발길을 끊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곳이었다. 누군가 “어이, 칭챙총”하면, 나는 옆구리에 낀 바게트를 씹으며 “그래, 좋은 날이다”하며 대꾸하게 될 무렵 그곳의 분위기에 익숙해졌음을 알았다.
나는 I에게 마을에서 '재밌게 사는' 법을 배웠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그 재밌는 것들이 웬만하면 무료였다. 내가 ‘이건 서울로 가야지’하던 행사들이 보르도에서는 옆 동네가 아니라 바로 그 보르도에서 벌어졌다. 내가 알기론 인천의 공원, 거리, 극장은 저렇지 않다. 문화생활이라고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밖에 없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볼거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보르도도 지역이고, 인천도 지역인데 왜 다를까? 왜 프랑스는 파리만 재밌지 않고 보르도도 재밌는 걸까?
파리 시장 안 이달고의 유명한 정책이 있다. 바로 15분 도시이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15분 이내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집 인근에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집중된 인프라를 분산시키는 효과는 물론이고, 자동차 이용을 감소시키는 생태적 효과도 있다.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지하철에서의 2시간은 당연하지 않았다. 서울에 포화한 다양한 인프라들은 어디로든 넘쳐흘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