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칩코 Mar 06. 2022

커밍아웃은 노을진 호숫가에서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집 구하는 데에 도움을 얻은 뒤, 나는 U와 퍽 친해졌다. U는 보르도 미술대학을 자퇴하고 애인과 타투하며 지낸다. 나도 마침 타투에 관심이 많던 때라, 타투를 몇 개 받으며 자주 왕래했다. U와 H는 특이한 사이였다. U는 레즈비언이고, H는 게이인데, 둘은 서로 처음 만난 헤테로 애인이었다. 나는 퀴어를 처음 발견(?)했다. 물론 내 주위에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난 몰랐으니까.


대중미디어에서 그리는 퀴어의 스테레오타입과는 불운하게도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나의 편견을 키우기도 했다. 미디어 속의 퀴어는 ‘동성마저도 반할 정도의’ 관능적이거나, 록스타같이 '트렌디'한데 내가 볼 땐 둘은 그랬다. 크로키와 빈 와인병으로 가득한 둘의 방. 낮에는 내내 잠만 자다가, 뱀파이어처럼 달이 뜨고 나서야 빈 거리로 나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생활 패턴. 몸 곳곳에 타투가 있고 검은 옷을 즐겨 입으며 입에는 담배를 문. 그런 힙한 퀴어들.


나는 내가 헤테로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한 마디로 남자로 보이는 인간들과만 연애하려 했는데, 한 번도 만족스러운 연애를 못 해본 사실은 참 안타깝다. 나는 너무 진지한 관계를 찾았다. 연애라고 하면, 같이 관짝에 들어갈 상대를 고르고야 말았다(소름 돋는 것, 이해한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가면, 그 사람이 어떤 신념과 취향을 가졌는지 압박 면접에 가까운 질문 세례를 퍼부어서 그 사람이 먼저 도망가게끔 하는 재주를 가졌다.


물론 그가 도망가지 않더라도, 그가 내 성에 찬 적은 없었다.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금방 헤어 나오기를 반복하며 살았다. 그렇게도 나와 닮은 사람을 찾았으면서, 그 상대는 귀신같이 꼭 남자였다. 그런 내가 하루는, U와 호숫가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서 노을을 보다가 고백을 해버렸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근데 여자야.” U에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프랑스어는 어려웠다. 뭔 놈의 단어에까지 성별이 다 있었다. 동사 변형도 한 명이 말했는지 여러 명이 말했는지, 그놈들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에 따라, 시제나 의미에 따라 무한 증식해서 변했다. 제일 충격인 건 숫자 읽는 법이다. 프랑스의 이십 진법 숫자 읽기는 고약하기로 유명하니 궁금하면 구글링해 보시라. 나와 같은 레벨이던 스페인어나 영어 화자인 친구들은 무서운 속도로 프랑스어가 늘었다. 워낙에 모어와 비슷한 단어가 많단다. 나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인종차별주의자 퇴치용으로 프랑스어 욕설만 청산유수가 되어갔다. 언어 공부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학원이 끝나면 문장을 통째로 달달 외우고, 숙제는 내준 당일에 끝내버리는 우울한 모범생이 되었다.


어학원에서는 선생도 학생도 모두 다정하게 지냈다. 하루는 베이킹을 잘하는 친구가 빵을 구워와 나누어 먹고, 하루는 음악을 공부하는 친구가 비파를 연주해주었다. 한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뜨개질했는데, 그 실력이 남달라서 주목받았다. 나는 비극적이게도 국문과였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은 프랑스어를 좀 못해도 그다지 가엽지 않았다. 내가 잘하는 건 한국어인데, 한국어는 뽐낼 일이 좀체 없지 않은가. 음악이나 미술처럼 언어의 장벽 없이 타인과 소통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가 지금껏 배운 것들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가끔 위로받곤 했던 국문 시집도 더는 읽지 않았다.


하루는 어학원 선생님이 수업이 끝난 후 숙제하는 나에게 다가왔다. 지난번에 내가 제출한 글쓰기 과제를 잘 읽었다고. 그녀는 내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너의 글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했다. 문법, 듣기, 말하기 등의 다른 파트는 몰라도, 쓰기 파트는 실력이 아주 월등하다고 했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이, 프랑스어 글쓰기에도 도움을 주는 줄은 전혀 몰랐다. 의기소침하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 것은 물론, 나는 그녀에게 더없이 감동해버렸다. 실로 나는 글쓰기 과제에 사활을 다하던 차였다. 한글로 된 글이 쓸모가 없으니, 프랑스어 글쓰기 과제에 살풀이하듯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었다.


그 뒤에도 글쓰기 과제에 열과 성을 쏟았다. 선생님을 아주 좋아하게 되기도 했다. 웃을 때 코가 찡긋하고 접히는 버릇을 가졌고, 붉은 단발머리와 굵은 뿔테가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나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는 이 마음이, 그간 내가 남자들에게 느꼈던 감정과 다르지 않음을 쉽게 알아챘다. 그러나 나는 누굴 좋아하면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어느 때는 세상 사람들 다 알만큼 들이대기도 하고, 어느 때는 너무 부끄러워서 그 사람이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길 만큼 피해버리기도 한다. 이 선생님의 경우는 후자였다. 나는 데이트 신청 한 번 못해보고, 글쓰기 실력만 본의 아니게 쑥쑥 늘어서 레벨이 바뀌는 바람에 다른 반으로 옮기게 되었다.


보르도에서 그린 그림

엄청 싱겁고도 짧은 짝사랑이지만,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인식한 여자 상대였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내가 금방 사랑했다가 식어버린 대상은 남자도 여자도 있었으나, 여자에게 끌림을 느낄 적엔 내 안에서 그것을 억압했음을 알아챘다. 이번에 그 느낌을 억누르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주 가까이에 그것을 억누르지 않고 사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퀴어인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도 엄청 힙한 퀴어로 살아가는 친구. 


그날 호숫가에서 U는 한껏 신이 나서 그녀가 누구인지 캐물었다. U가 즐겨보는 퀴어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쑥스러우면서도 덩달아 신이 나버렸다. 내가 그토록 멋진 붉은 머리 여자를 좋아했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수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는 것은 분명 신이 나는 일이었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