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프랑스식 인사가 있다. '비쥬'라고 하는데, 만나면 양 볼에 번갈아 쪽 소리를 내는 다정한 인사다. 친한 친구와 가족끼리도 하지만, 이제 막 서로 소개하는 처음 본 사이에서도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뽀뽀하면 안 된다. 볼을 찰싹 붙이거나, 귓구멍에 질척이게 쪽 소리를 내도 역시 이상하다. 볼 맞대는 시늉 하고 귓가에 담백하게 입술을 붙였다 떼는 소리만 내는 게 정석인 것 같다. 한 마디로 적당한 거리가 중요한 인사법이다. 프랑스에서 오래 유학한 친구 U가 내게 조언해주었다. “비쥬할 때 진짜 뽀뽀하는 놈들은, 변태 아니면 장난치는 거야.” 장난을 그렇게 치는 게 변태 아닌가. 알쏭달쏭했지만 어쨌거나 변태였다.
새침데기 할머니 댁에서 나와 새집을 구할 적에, 아직 언어가 서툰 나는 U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집주인은 친절했다. 나와 U에게 집 이야기를 순조롭게 마치고, 그는 마지막 인사로 비쥬했다. 찐하게. 볼에 그의 침이 묻을 정도로. 음... 조언에 따르면 그는 변태 아니면 변태였다. 나와 U는 둘 다 볼의 침을 닦으며 찝찝하게 집을 나왔다. 이 집... 괜찮나? 괜찮을 리가. 그 집주 놈은 나중에 나에게 자기 무릎에 앉아 보라지를 않나, 결혼하자고도 했다. 이후에도 비쥬할 때 거리를 안 지키는 놈은 다 이상한 놈이었다. 각설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보르도가 도시인데도 살기 좋았던 까닭은 인구가 적당해서다. 녹지 공원을 밀고 집을 테트리스 하듯이 짓지 않아도 되는 인구. 트램 문을 다시 열어줄 여유 없이 출발해야 하는 지옥의 배차 간격이 아니어도 괜찮은 인구. 일과를 마친 주민들이 강변 잔디밭에 모두 와서 쉬어도 벚꽃 시즌의 여의도처럼 되지 않는 인구. 실제로 내가 지난 화에서 말한 보르도의 풍경은 지금 내가 사는 지리산의 풍경과 닮았다. 적당한 인구가 적당한 거리로 모여 살면 그런 여유로운 풍경이 나온다. (물론 비인간과 장애인도 이용하기 편한 대중교통은 전혀 다른 풍경이지만)
보르도에서도 땅값이 싼 구역은 시장통처럼 된다. 가난한 난민과 이민자는 저렴한 구역으로 모이고 모여서 결국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길에서도 부딪치고, 방에서도 소음이 침범하고. 약한 존재들은 못 견디고 밀려난다. 나무같이 꼭 필요한 존재가 말이다. 나무가 없으면 그 곁에 쉬는 새들도 쫓겨난다. 물론 도시에 오지도 못한 존재도 있다. 저 멀리 땅값이 저렴한 시골에서도 딱 제 몸만한 케이지에 갇히는 닭과 돼지 같은 존재. 양식장에 갇힌 연어는 너무 좁은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서로를 물어뜯는다. 옆의 연어가 유독 미워서가 아니라, 여유가 없으니 그렇다. 내게 이유 없이 “꺼져 칭챙총아”하던 그 양아치 아랍인들처럼.
보르도에서 나는 기를 쓰고 그 구역은 피했다. 진짜 무서워서다. 염색이 아닌 ‘찐 금발’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새침데기 할머니도 인종차별주의자여서 보다는, 정말 한 대 맞을까 봐 그곳에 안 가는 지도 모른다. 내가 돈 없는 유학생이어도, 매일 '어깨빵' 당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동네가 좋았다. 그러다 찾은 집이 변태의 집인 것은 아이러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