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 프로젝트는 한국 고유의 문화가 현대인들이 일상 속에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전통문화 플랫폼입니다. 제품, 콘텐츠, 행사 등으로 잊혀지고 소외된 과거 전통문화와 현대 문화를 이으며, 그중 한국의 장인 선생님들의 기술, 취 프로젝트의 기획과 디자인으로 만든 제품들을 통해 한국 전통 기술이 현 소비자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합니다.
취 프로젝트는 전통 공예를 공부하며 제작자와 시장 사이 큰 괴리를 느꼈습니다. 선생님들이 만드시는 제품은 하나가 나오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정성이 듭니다. 하지만 요즘 일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인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일상에서도 쓰일 수 있는 물건을 제작하는 선생님이 계시곤 합니다만, 가격이 너무 높아 선뜻 구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취 프로젝트는 이 괴리를 좁히기 위해 장인 선생님들과 시장이 상생할 수 있는 협업 시스템과 제품을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하시는 공예를 더욱 면밀히 관찰하니 장인 선생님들이 하는 작업 과정에서 우리에게 잊힌 어떤 “마땅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취 프로젝트는 선생님과 시장이 상생할 수 있는 협업 시스템과 제품을 고안합니다.
“마땅하다” 일정한 조건에 어울리게 알맞다.
한국의 전통 공예, 즉 수년의 시간 동안 전승되고 정제된 솜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잘 맞는 모양, 가장 자연스러운 재료를 사용합니다.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지방에선 죽공예가, 말 목장과 교통이 편리한 곳엔 말총 공예가 활발히 만들어진 점이 그 예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에 의해 진행된 급격한 산업혁명, 옆을 돌아볼 틈이 없었던 근대를 거쳐 과거를 뒤돌아볼 때, 장인 선생님이 제안하는 물건과 그 물건이 제안하는 삶의 방식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들여다볼수록 우리가 알고 향유하기에 “마땅하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 프로젝트가 전통 공예를 지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마땅함 때문입니다.
마땅한 방법은 최선의 방법, 유일한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마땅한 방법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땅히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뿌리를 잃어 그 당위성을 잃는다면 굉장히 아쉽지 않을까요?
보다 건강한, 보다 마땅한 소비 생활을 제안하기 위해, 취 프로젝트는 그 뿌리를 알고자 합니다. 취 프로젝트의 새로운 연재 시리즈, “서울의 장인들”을 소개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 중 절반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 – 그 똑같은 땅 위에서 몇 백 년 전, 솜씨 좋은 장인들이 직종에 따라 마을을 꾸려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곳에,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삶의 방식들을 제안해줄 수 있을까요?
출처 : https://english.visitkorea.or.kr
서울의 장인들은 누구였을까?
조선시대의 장인들은 대대손손 기술을 연습해 국가의 관리를 받으며 물건을 제작하는 기술자들이었습니다.
산업 사회 이전,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물자는 장인들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장인이 하나의 예술로 여겨지는 지금과 달리, 생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보다 일상적인 영역에 존재했습니다. 장인(匠人)이란 표현이 아닌, 공장(工匠)이라 불리었습니다. 현재 공대생을 말하는 그 공과 같은 한자입니다.
아낙네들은 빨래를 할 때마다 옷을 깁고, 마을마다 있는 대장장이는 농경 사회에 필요한 농기계, 말굽 등을 제작했습니다. 신발이 떨어졌다면 좋은 지푸라기로 신을 만들어 신었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침선장, 주물장, 왕골 공예 장인일 수 있겠습니다.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도.
하지만 이런 일상적 물건 외에도 국가와 왕실에 필요한 물건들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엔 나라가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장인 집단을 직접 관리했습니다. 이들은 지방 관아에 속해있는 외공장과 서울에 있는 경공장으로 나뉘어, 국가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하고 납품했습니다. 이 공장들의 목록과 체계는 한성의 관찰인 한성부와 세조 때 처음 만들어진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표기된 목록엔 170여종목의 장인이 서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익숙한 놋쇠장에서 말 안장 우비를 만드는 장인까지, 서울 안에서도 필요에 따라 무척 다양한 종목이 있었습니다. 한 종목당 약 2명에서 105명이 담당 장인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경국대전의 내용 중 발췌한 경공장 목록 중 일부입니다. 이들은공조(工曹)·병조(兵曹)·이조(吏曹) 산하의 30개 아문에서 보유한 공장 아래 속했습니다.
경국대전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엔 우리에게 익숙한 장인도, 낯선 장인들도 있었습니다.
옻칠장이[漆匠]는 우리에게 익숙한 옻칠 장인, “칠장”(漆匠)입니다.
자개박이 장 또한 “나전장”(螺鈿匠)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취 프로젝트와 익숙한 죽공예도 죽장(竹匠)으로, 건축을 맡아본 관청인 선공감에 20명이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으로 선공감에 필요한 다양한 항목과 많은 인원을 통해 건축물 조성에 많은 공력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과거 장인 기술로 이해할 수 있는 서울
사람과 가장 밀접한 기술, 공예. 그러므로 공예를 통해 사람들이 살던 그 지역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조지서(造紙署)는 조선시대에 종이를 만들고 관리한 부서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지서엔 대나무 발을 제작하는 염장(簾匠)과 지장(紙匠) 81인이 속했다고 합니다. 무려 서울의 지장 91명 중 81명이 있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양의 종이를 만들기 좋은조지서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좋은 종이를 만들기 적합한 곳은 물과 가깝고, 해와 바람이 잘 드는 곳입니다. 닥나무 섬유를 씻고, 섬유질을 뜨는데 엄청난 양의 깨끗한 물이 필요하며, 한지가 나오기까지 몇 차례의 자연 건조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가 아는 서울 속 종이를 만들기 적합할 것 같은 공간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조지서는 서울 도심인 창의문 밖, 세검정에 위치했습니다. 지금도 맑은 계곡 물이 흐르는 세검정 근처는 넓은 돌들이 많아 종이를 말리기 적합했다고 합니다.
비록 세검정이 있는 백사실계곡에서 지금 종이를 제조하긴 힘들어도, 실록을 편찬하는 종이를 만들 정도로 물과 바람, 햇살이 빼어난 곳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취 프로젝트, 서울을 말하다.
우리가 사는 곳, 우리가 아는 서울은 정말 다양한 풍경이 혼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취 프로젝트는 "서울의 장인들" 연재를 통해, 과거 서울에서 활동했던 장인들의 기술, 환경을 소개하고, 이를 21세기 우리가 사는 서울과 비교해 그 상관성을 찾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