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을 성벽의 꿈

푸른 바다

by 윤슬


오랜 시간 빵집의 밀가루 먼지를 뒤집어쓰고, 큰집을 떠나 작은 집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살았던 세월은 내 안에 무서운 야망을 심어놓았다.

나는 그저 '행복한 여자'로 남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나를 무시했던 이 땅에, 그리고 우리 가족의 불행을 가십거리로 삼던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 증명하고 싶었다. 그 지독한 생존 본능은 어느덧 '야망'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되어 내 사랑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나의 안식처였지만, 동시에 내가 넘어야 할 '안주'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라면 평생 따뜻하고 평온하게 살 수 있었겠지만, 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성공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대신, 내 야망의 손을 잡았다. 더 좋은 기회,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나는 그가 내밀었던 손을 서서히, 그리고 차갑게 놓아버렸다.


그때 나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거창한 섭리 따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 나를 지탱해 주어야 할 사랑만큼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다.


아빠가 남기고 간 텅 빈 자리는 내게 사랑이란 언제든 증발할 수 있는 신기루임을 가르쳤고, 엄마를 향한 나의 무조건적인 순종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가혹한 기회비용이었다.


그 사람의 온기는 분명 진실했지만, 나는 그 다정함조차 언젠가 나를 내던질 함정처럼 느껴져 뒷걸음질 쳤다. 사람의 마음처럼 유한하고 가변적인 것에 나의 생을 걸기엔,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결핍을 목격해 버린 아이였다. 나는 사람의 마음처럼 유한한 것 대신, 누구도 뺏어갈 수 없고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을 '영원한 성벽'을 원했다. 그것이 성공이든, 권력이든, 혹은 증명된 경제적 능력이든 상관없었다. 나를 버리지 않을 유일한 것은 오직 내가 쥐고 있는 힘뿐이라고 믿었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더 행복했을까." 벌써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문득문득 이 질문이 가슴을 찌른다. 그때 내가 야망 대신 내 감정에 조금 더 솔직했더라면, 성공이라는 껍질 대신 그의 따뜻한 품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내 영혼은 그 시절 그 바닷가에서 떠날줄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휴양지의 평화로운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 투명하고 얕은 바다는 내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한다.

대신, 지독하리만치 검고 푸른, 깊은 바다를 볼 때, 혹은 비가 내리는 거친 바다 앞에 설 때면 심장 밑바닥을 넘어 내장 깊숙한 곳까지 통째로 텅 비어버리는 듯한

그 서늘한 감각에 숨이 멎곤 한다.


아마 지금도 그 한적한 바닷가 도시를 가면, 그는 여전히 같은 집에 살며 가끔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클럽에서 혼자 술을 기울이고 있을지 모른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시간이 멈춘 듯 그곳에 머물러 있는데, 나만 홀로 비겁한 성공을 거두고 멀리 떠나온 것만 같아 괴롭다. 다시 가보고 싶지만, 다시는 갈 수 없는 그곳.


아니, 정확히는 돌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그 시절의 나.

나는 정말 자주 그곳을 떠올린다. 비 내리는 바다는 그날 밤, 그의 집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를 닮았다.

깊고 푸른 바다는 내가 끝내 외면했던 그의 진심 어린 눈동자를 닮았다. 그 시린 풍경 앞에 서면 나는 다시 20대 초반의 그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 내가 버린 것이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내 인생의 가장 열정적이고, 지금은 갈망하는 다른 의미의 꿈이 되어버린 그 시절이었음을 깨닫는다. 지금의 나는 세상 그 어느 도시라도 당장 갈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얻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단 한 도시, 그 사람이 머무는 그곳만은 갈 수가 없다. 아니, 발을 내딛는 순간 내가 쌓아 올린 이 견고한 성공의 성벽이 무너져 내릴까 두려워 뒷걸음질 친다.


나는 성공한 이방인이 되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비 내리는 바다 한 조각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는 낙관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여전히 언제든 증발할 수 있는 신기루이며, 언제든 누군가를 내팽겨칠 수 있는 위태로운 약속일뿐이다. 하지만 그 지독한 불신 끝에 한 가지 새로운 진실을 얻었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사랑이 남기고 간 '그리움'만큼은 죽음조차 뺏어갈 수 없을 만큼 영원하다는 것을. 나를 버리지 않을 성벽을 쌓기 위해 나는 그를 버렸으나, 그의 환영은 영원히 날 그 성벽안에 가두어 두고 있다.


첫사랑은 그렇게 마음 시리게 평생 몸의 상처처럼 남는가 보다.

그 시린 통증만이 내가 한때 뜨겁게 사랑받았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징표인 것처럼.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