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깊은 바다

by 윤슬

언제나처럼 남반구의 하늘은 참 푸르고 맑았다. 손을 뻗으면 파란 물감이 묻어날 것처럼 투명하고 청명한 하늘. 그 당연했던 풍경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낯설게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대라는 좁은 감옥에 갇혀 천장의 무늬만 헤아리던 시간들이 얼마나 흘렀을까. 느낌상으로는 족히 몇 년은 흐른 것 같았다. 18살의 이민 생활부터 30대 중반의 무너짐까지, 내 인생의 모든 계절이 그 짧은 정적 속에 압축되어 스쳐 지나간 기분이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 검도록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예전처럼 나에게만 전적으로 기대어 오던 아기들의 무게가 팔에 남아있었지만, 눈을 뜨면 마주하는 것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한 오후였다. 그 청명한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에 고여있던 무거운 납덩이가 아주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변함없는 하늘의 무심함이 나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내가 무너져 있든, 회사를 짤렸든, 사랑에 실패했든 상관없이 하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하늘은 저렇게 푸르구나." 몇 년의 세월을 건너온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아주 미세한 생의 감각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의 심연에서 나를 끌어올린 건 거창한 위로도, 구체적인 조언도 아니었다. 그저 창밖을 지키고 서 있던 그 맑고 높은 하늘, 그 당연한 빛 한 조각이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던 손에 힘을 주어 보았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마음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저 하늘이 왜 저토록 푸른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긴 겨울잠을 끝내고 처음으로 마주한 세상은, 아프도록 눈부셨다. 그 푸르고 청명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궤적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참, 드라마틱하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건조했지만,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일렁였다. 서른다섯 해에 덧붙여진 무기력의 그 몇 년. 그 짧다면 짧은 생의 시간표 안에 너무나 많은 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18살의 이민, 큰 집에서의 고립, 아빠의 실종과 죽음,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던 첫사랑과의 이별, 그리고 악착같이 매달렸던 성공과 허망한 추락까지. 보통의 사람이라면 평생 한두 번 겪을법한 거대한 파도들이 나에게는 계절이 바뀌듯 들이닥쳤다. 하늘이 언제나 저렇게 청명하게 빛날 때, 나의 내면은 몇 번이나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던가. 그 압축된 세월이 나를 남들보다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취약한 아이의 상태로 되돌려놓기도 했다. '35+n'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그 무게가 새삼스럽게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드라마틱한 삶의 전개들을 하나씩 짚어보며, 나는 역설적인 안도감을 느꼈다. 이토록 모진 풍랑을 다 겪고도,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으며, 다시 저 푸른 하늘의 빛깔을 인지할 만큼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이제야 지독한 갈등의 장을 지나, 다음 막을 준비하는 짧은 암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던 나의 과거를 원망하기보다, 그 수많은 폭풍우를 견뎌낸 '나'에게 처음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비록 회사는 짤렸고 마음엔 구멍은 여전히 메꾸어지지 않았지만, 이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은 여전히 나였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나는 이제 그 하늘 아래로 다시 발을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몇 년의 정지된 시간이 결코 헛된 멈춤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증명해야 할 때였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