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는 '이쁜 낙서' 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루, 쿠스코

by 월세부부

이 정도였어! 다들 잠도 안 자나!


졸린 눈을 비비며 숙소에 자그마치 새벽 5시에 나왔는데 버스 타는 줄은 이미 길게 늘어져 있었다. 버스? 그렇다. 마추픽추를 올라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버스를 타거나 걸어 올라가면 된다. 편도요금이 12달러로 페루 물가에 비해 헉! 할 정도로 비싼 편이지만 고민 끝에 올라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우리도 처음에는 '버스' 그 딴 거 안 타고 어제 하루 종일 기찻길을 걸었던 것처럼 짠내 나고 독하게 마추픽추 입구까지 걸어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페루-리마에서 만났던 여행자들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큰 감흥이 없으니 웬만하면 버스 타고 올라가라고 '조언'했다. 요는, 나중을 위해 체력을 아끼라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우린 마추픽추 표를 살 때 '몬타냐'가 포함된 표를 샀다. 한마디로 마추픽추에 입장한 후 산 하나를 올라가는 티켓을 샀단 말이다. 우린 몬타냐를 올라기 위해서라도 체력을 아껴야 했다.


40분을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탔다. 버스는 지그재그 길을 반복해서 올라갔다. 가는 동안 내리막 길은 없었다. 30분 만에 마추픽추 입구에 도착하니 또 다른 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마추픽추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다양한 포즈로 줄서는 것을 보러 왔다고 해야겠네. 줄을 따라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입구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오른쪽에 작은 길에서 말 그대로 땀범벅이 가 된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오만상을 하고 올라오는 사람, 해처럼 벌건 얼굴을 한 사람, 옷을 벗고 수건으로 자신을 몸을 닦는 사람 등 다양했다. 그들은 버스를 마다하고 이곳까지 자신의 두 다리로 뚜벅뚜벅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정말 힘들었나 보네. 저 땀들 봐. 새벽부터 산과 레슬링 한판 한 것 같네. 만약 우리가 새벽부터 저 길을 올라왔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아무튼 박수 보낼만한다. 저들에게.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마추픽추 입장! 흐린 날씨 때문인지 안개가 쫙 깔려있었다. 앗! 마추픽추다. 우린 TV와 인터넷으로 수 없이 본 마추픽추를 째려보듯 응시했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아니면 날씨가 흐려서? 마추픽추를 보면 탄성에 호들갑에 각종 오버를 떨 줄 알았는데 막상 본 느낌은 이게 마추픽추구나! 가 전부였다. 감동스럽거나 첫사랑 같은 설렘은 없었다. 밤 사이 뱀파이어에게 피 대신 '감정'이 쭉 빨리기라도 한 건가? 뜨뜻미지근한 나의 반응에 제일 놀란 것은 바로 나였다. 일단 몬타냐에 올라갔다 와서 다시 한번 마추픽추를 보자. 그때에도 감흥이 없다면 마추픽추는 나와는 안 맞는 걸로!

몬타냐 입구에서 계단을 오르며 무심코 아내에게 물었다. 얼마나 올라가는 줄 알아? 헉헉. 아니. 전혀 몰라. 헉헉. 산이니까 올라가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겠지? 헉헉.


열심히 돌계단을 올라갔지만 몬타냐 정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깃발 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틀린 적이 있던가? 몬타냐 정상은 저 젠장할 '깃발' 있는 곳이 맞았다. 정상 깃발을 확인하고 나자 새벽에 버스 타고 입구까지 올라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마추픽추 입구까지 걸어서 올라왔다면 이 몬타냐를 올라갈 때 욕쟁이 할머니 버금가는 욕들을 쏟아 냈을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그건 내가 100% 보장한다. 1시간 반 만에 큼직 막 한 깃발이 꽂혀있는 정상에 도착해 몸을 조금씩 돌려가며 눈 앞에 보이는 안데스 산맥을 감상했다. 산들이 다들 헤라클레스 같다. 웅장함과 거대함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마추픽추가 장난감처럼 내려다보이는 돌 위에 앉아 경치를 감상했다. 어떻게 산 위에 저런 건축물들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과연 저것들을 사람들이 정녕 만든 것일까?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아무리 마추픽추가 대단해도 자연이라는 '캔버스'에 인간이 만든 마추픽추는 '이쁜 낙서' 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쁜 낙서일 뿐이라고.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자 마추픽추가, 와이나 픽추가, 모두가 내발 아래 아래 있었다. 모두가 내발 아래!

몬타냐를 내려와 태양의 문에 도착해 안개가 그치길 기다렸다. 30분 남짓 됐을까? 산이 수줍게 옷을 벗듯,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휴대폰과 카메라를 꺼내기 시작했고 나도 휴대폰을 꺼냈다. 안개다 다 걷히자 새벽에 지그재그로 올라왔던 버스길이 선명하게 보였고 저 멀리 마추픽추가 보였다. 그때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졌고 나도 와~ 와~ 했다. 마추픽추는 '햇빛'이 있어야 완성되는 거였구나! 햇빛이! 더 좋은 더 멋진 더 감격스러운 표현으로 말하고 싶었는데 안개가 사라질 때 내 머리 속의 모든 단어들도 함께 가져갔는지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난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와~ 와~만 반복했다.


태양의 문에서 내려오자 마추픽추는 황금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흐린 새벽이라 그랬구나!

지금 보니 전혀 달라 보이네. 멋지다!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한참 동안 사진을 찍고 적당한 자리에 누워 광합성을 하며 마추픽추를 감상했다. 오랫동안 보고 있자니 돌들을 나르는 고대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고 그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마추픽추를 왜 만들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투툭! 하며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린 새벽에 땀범벅이 들이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돌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버스 타고 오길 잘했다! 를 수 없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숙소에 도착할 때쯤 뱃속의 허기가 집요하게 으르렁거렸다. 근처 피자집에서 허기를 채우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푹 쉬었다. 다음날까지 정신없이 잤다. 밤새 침을 흘린 것 같고 꿈속에서 산을 헤맨 것 같고 잠꼬대를 한 것 같고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는데 나도 모르게 '윽!' 소리가 튀어나왔다.


짐을 꾸려 2시간 동안 기찻길을 걷고 택시기사들과 흥정하고 흥정 실패하고 다시 흥정하고 차를 타고 다른 마을에 내려 이번에는 봉고차 기사와 밀고 당기는 끈질긴 협상 끝에 봉고차를 타고 봉고차 기사의 '삶'을 무시한 빠른 커브질과 중앙선을 넘는 추월로 4시간 반 만에 쿠스코에 도착했다. 3박 4일의 자체 마추픽추 여행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거대한 안데스 산맥을 보며 기찻길을 걷는 것도, 마추픽추를 보는 것도, 안드레스와 함께했던 3일간의 여행도...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