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미친 똥개를 봤나!

페루, 쿠스코

by 월세부부

흐린 날씨였다. 90년대 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현진영이 힙합 복장을 하고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부를 것 같은 그런, '흐린 날씨'였다. 어제 산 바나나를 소시지 먹듯 한입 베어 물며 오늘 일정을 생각했다. 잘할 수 있겠지? 기찻길 걷기. 다리 아픈 거야 훈장쯤으로 여기면 될 일이고 다른 변수는 안 걸어봐서 잘 모르겠다.


많은 여행자들이 시간이 없어서, 편해서, 귀찮아서, 돈이 많아서(이런 사람들 종종 있다) 여행사를 통해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 일정으로 '마추픽추'를 갔다 온다. 그러나 그건 여행사를 통했을 경우고 그렇지 않을 경우 마추픽추를 가는 방법은 자금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자금이 있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최대한 '기차'를 이용하고 자금이 없고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기찻길'을 이용한다. 우린 기찻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마추픽추 근처 마을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스페인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에 온천이 있다)까지는 걸어서 약 30km 남짓. 중간에 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오늘 도착해야 한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처음 걸어보는 길이라서 그런지 막연한 두려움이 좀처럼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잉카 트레일 82km 지점을 가기 위해 재래시장에 갔다. 봉고차 기사는 40분 후에 출발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경험을 비추어볼 때 1시간 반 후에나 출발할 가능성이 크다. 예측은 정확했다. 기사는 내 예측을 꼭 맞춰주고 싶은 사람처럼 1시간 반 만에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 안에는 한 외국인을 제외하고 모두 현지인이었다. 딱 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국인이 심심했는지 말을 걸었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생으로 졸업 전에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여행을 왔는데 일정을 물어보니 오늘 기찻길 걷고, 내일 마추픽추 올라가고 모레, 마추픽추 근처 마을까지 2~3시간 걷고 봉고차로 쿠스코로 돌아가는 것까지 소름 돋을 정도로 우리와 동일했다. 안드레스! 여행 좀 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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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차를 타고 잉카 트레일 시작점 앞에 내려 인증샷을 찍고 기찻길 안으로 걸어가려고 하는데 중년의 기차 직원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안드레스는 네이티브답게 스페인어로 빠르게 말했고 기차 직원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가 좀처럼 포기하지 않고 다부지게 매달리자 그는 우리가 불쌍했는지 남은 고기를 툭 던지듯 마을 위로 한번 올라가 보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면서 그가 알려준 글을 걷다 보니 과연 기찻길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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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로 끝없이 쭉 뻗어 있는 기찻길을 보자 나도 모르게 이제 시작이구나! 말이 튀어나왔다. 강 건너편에는 3박 4일간 잉카 트레일을 하는 사람들이 형형 색깔의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경치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코너를 돌면 안데스 산맥이 '왔어! 친구! 하며 하얀 구름으로 한껏 치장한 몸을 슬쩍슬쩍 보여줬다. 기찻길을 걸으면 지루할 줄 알았는데 하늘 좋고, 강물소리 시원하고, 바위들 큼직큼직하고, 기찻길에 깔린 자갈들은 좀 힘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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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스를 선두로 우린 걷고, 또 걸었다. 절대 지루할 것 같지 않던 안데스 산맥이 지루해지고 강물소리가 모기소리처럼 작아질 무렵, 뿡~ 하고 기차가 굉음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칙칙폭폭. 재빨리 기찻길에서 나와 기차 내부를 바라봤다. 카메라 셧터를 누르는 사람,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 둘이서 다정하게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에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저 사람들 뭐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난 뭐긴 뭐야! 기찻길 걷는 사람들이지!라고 표정으로 답해줬다. 부럽다. 그곳은 편하고 달콤하잖아. 솜사탕처럼. 여긴 온통 딱딱한 자갈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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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보내고 한참 동안 무념무상의 상태로 걷고 있는데 정적을 깨는 '개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섯 마리쯤 돼 보이는 한 무리의 개들이 우리를 향해 정신없이 짖고 있었다. 아까 전에도 개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렸는데 이곳은 아까보다 개들이 더 많네. 영역 침범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뿐이니까 그만 좀 짖어줄래? 너희들이 짖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심장소리에 맞춰 뿜어져 나오고 있다고! 혹시, 그거 알아? 나 화나게 하지 마. 녹색 괴물로 변하면 그때는 아무도 말리지 못하거든. 일단 변하면 너희들을 마추픽추 정상까지 던져버릴지도 몰라! 개줄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는 개 때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다시 기찻길을 걸었다. 4시간 넘게 걷다 보니 난 어느새 가수 god의 '길'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눈 앞에 터널이 보였다. 그리고 곧 직감이 말했다. 빨리 통과해야 한다고. 만에 하나라도 터널 안을 통과하고 있는 사이 칙칙폭폭 하며 기차가 오면 그거야 말로 죽은 목숨이라고. 휴대폰 전등을 켰다. 그리고 직감이 조언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터널을 통과했다. 별 거 아닌데 터널 통과는 매번 긴장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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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개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훨씬 공격적이었고 소리가 컸다. 개 짖는 소리에서 살기를 느껴서였을까? 안드레스는 주춤했고 난 본능적으로 주위에 있는 나무를 들었으며 아내는 내 등 뒤에 껌처럼 딱 달라붙었다. 뭔가 다르다. 이 개 무리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가방을 고쳐 메고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개들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사납게 짖어대더니 급기야 언덕에서 하나둘씩 기찻길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는 기찻길에서 개들이 이렇게 무섭게 짖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였는데...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자 무리 중에 리더로 보이는 황색 개가 두 개의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우리를 가로막고 짖어냈다. 내가 안드레스에게 조심하라고 말하는 순간 황색 개는 총알처럼 안드레스 왼쪽 허벅지에 달려들었다.


안드레스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흔들어 개를 떨어뜨렸고 난 그 개 주둥이 앞에 나무를 들이밀었다. 여차하면 때리기 위해. 가까스로 그 지역을 통과한 후 안드레스 다리를 확인했다. 바지에는 두 개의 구멍이 나 있었고 불행 중 다행인지 두 군데 이빨 자국이 난 곳에는 살짝 피만 맺혀있었다. 이런 미친 똥개를 봤나! 아니 조용히 지나가는 사람을 왜 물어! 아무리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해도 이건 심하잖아!


굵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또 다른 무리의 개들이 언덕에서 짖어댔다. 신의 정기라도 받았나? 거참 유난스럽네. 거리를 보나 시간상으로 보나 이 무리를 지나면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 도착할 것 같은데 저 눈 뒤집고 발광하는 개들이 문제구나! 안드레스도 이미 한번 개에 물린 상황이라 섣불리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쓰러져가는 집 쪽을 보며 큰 소리로 "세뇨르"(아저씨)를 여러 번 외쳤다. 그러나 집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우리 힘으로 이 미친개 무리를 지나가야 했다.


우린 거북이처럼 천천히 이동했고 개들은 고막을 찢을 듯 짖어댔다. 들어와! 들어와! 이 개들아! 기차 사장이 시키드나! 너희들은 페루 정부에 놀아나고 있는거여~ 비 오는 날 땀 흘려가며 그 개 무리를 통과하고 나자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기찻길을 걸은 지 7시간 하고도 30분 만이었다. 우린 서로 하이파이브를 치고 해냈다고 그 개들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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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아스 깔리엔떼스 물가는 머리 털이 쭉! 설만큼 비쌌다. 성수기였기에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선택지는 없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호스텔 가격은 한 달 만에 20% 이상 오른 상태였고 그나마 방도 없었다. 안드레스와 함께 들어간 호스텔은 성수기에 비해 값은 쌌으나 시설은 열악했다. 곰팡이 냄새가 심했고 침대는 투명인간이 이미 누워있는 것처럼 바닥까지 푹 꺼져있었다. 2 솔(약 800원)만 깎아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직원 매몰차게 거절했다. 치사하다. 치사해. 그깟 2 솔 더 낸다! 방에 들어가 신발을 벗자 진한 메주향의 냄새가 진동했다. 와라즈에서 만났던 까나리 맨이 잠시 생각났지만 그 친구에게 비하면 내 발 냄새는 향수라고 중얼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 꼼꼼히 발을 닦았다. 오늘 기칫길 트래킹은 미친개들과 수많은 자갈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내일은 드디어 마추픽추에 간다!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