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행복한 사람이다.

페루, 와라즈

by 월세부부

좋은 아침!

좋은 아침!


가이드인 크리스티나는 어젯밤에 공지 한대로 정확히 새벽 4시 15분에 각 텐트를 돌면서 사람들을 깨웠다. 제시간에 깨워준 건 고마운데 눈이 떠지질 않아. 눈꺼풀을 딱풀로 붙인 것 같아. 졸려 죽겠네. 1시간만, 아니 딱 2시간만 더 자고 싶다고 생각하며 졸고 있는데 어젯밤 공지가 궛가에서 자동 재생됐다. 4시 15분 기상. 5시 출발. 2시 반 동안 트래킹 후 마을에서 아침식사. 이후 차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 전망 보고 69 호수 트래킹을 마치고 모든 일정 종료. 오늘은 그 어느 날 보다 일정이 빡빡했다. 헤드랜턴을 켜고 거친 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오늘 일정처럼 깜깜했다. 벌써 4일째라니!

첫째 날, 안데스 산맥의 절경 앞에 이전에 봤던 절경들은 일부는 흑백 처리되고 일부는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만큼 강렬하고 거대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볼 때는 매서운 추위도 잊고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둘째 날, 3보 1 카, 그러니까 3보 걸으면 한 번은 사진을 찍고 싶은 경치가 눈 앞에서 끝없이 펼쳐졌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죄다 윈도우 바탕화면이었다. 텐트 안이 북극처럼 추워서 뜨끈한 국밥 하나에 영혼까지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째 날, 4750미터까지 올라갔다.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하고 있는데 우리 뒤를 3일째 따라오던 개는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봤다. 난 그 개가 두 개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박지성보다 더 강해 보였고 나중에는 좀 무섭기까지 했다. 너 귀신 아니지? 살아있는 거 맞지? 그런데 그렇게 호들갑 떨고 강렬했던 경치도 시간이 흐르면 안개처럼 흐릿해진다. 그래서 시간은 독종이다.

일정대로 새벽 5시부터 트래킹이 시작됐다. 12명 이마에 달라붙어있는 헤드랜턴이 야생동물의 눈처럼 어둠 속에서 유독 밝게 빛났다. 난 선두그룹이었고 그중에서도 크리스티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간혹 사소하게 미끄러졌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지만 4년 넘게 가이드를 한 그녀를 이곳 안데스 산맥에서 처음 트래킹 하는 내가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가 좀 걱정됐다. 그녀는 제대로 잠을 못 잤는지 시간이 갈수록 비틀거림이 심해졌고 급기야 다리를 앞으로 주욱~ 벌리며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오른쪽 발목이 완전히 뒤로 꺾였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난 그녀의 가방을 멨고 이스라엘 그룹 리더인 예리는 배낭에서 압박붕대를 꺼내 그녀의 발목을 칭칭 감았다. 여기까지는 훈훈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리가 매우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이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갈 테니 모두 먼저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함께 트래킹을 하던 사람들은 그의 느닷없는 반응에 어리둥절했고 난 20대 초반의 공명심이 저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예리는 쌀 가마니를 메듯 그녀를 메고 언덕을 올라와 쉬는 것을 반복했다. 그도 이곳에 와서 사람을 메고 등산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으리라! 내 뒤를 따라오는 그들이 걸렸다. 마음속은 아까 전부터 도와주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예리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참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신호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 난 방향을 바꿔 길을 내려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리를 삔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예리는 나를 보더니 당장 떠나라고! 빨리 가라고! 나의 군대 상사라도 되는 양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너만 등산하고 있냐? 이 자식아! 다른 여행자들의 저 걱정스러운 눈빛들은 보이지도 않아? 그리고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내가 크리스티나를 도와주겠다는데 네가 왜 난리냐고! 네가 무슨 크리스티나 애인이라도 되는 거야? 이 20대 초반의 애송이야! 넌 맞아야 돼! 더! 더! 더! 신나게 두들겨 패고 다시 때리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려 일어나는 그를 다시 두들겨 패기를 '머리 속에서' 반복하고 나자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가 서서히 누그려졌다. 난 미친 눈을 하고 있는 그의 눈빛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그래. 어차피 넌 내 인생의 그저 스쳐 지나가는 티끌일 뿐일 텐데 이렇게 시간 낭비, 감정 낭비할 필요 없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남은 여행자들과 발길을 재촉했다.


2시간 반 만에 도착한 마을은 작고 한적했다. 이정표를 보니 이곳 마을은 트래킹 시작점이자 끝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69 호수 트래킹이 남아있다. 그것도 추가 지불 없이! 트래킹 첫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가이드가 나와 아내에게 조용히 다가와 트래킹 끝나는 마지막 날에 69 호수 트래킹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었다. 이 트래킹을 끝내고 69 호수 트래킹을 하려고 했던 우리에겐 이 보다 더 좋은 제안은 없었다. 돈 절약하고 시간 줄이는 한마디로 '대박' 제안이었다.


한참 후 예리 일당과 크리스티나가 언덕을 느릿느릿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녀는 예리 등이 아닌 다른 남자 등에 업혀있었다. 트래킹 내내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준 프렌시스코 요리사였다. 마지막 언덕을 올라온 프렌시스코 얼굴에는 땀범벅이, 그의 등 뒤에 업혀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예리녀셕!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만 결국 고생은 프렌시스코가 다했네. 그녀는 식당 한편에 있는 자그마한 침대에 누웠고 프렌시스코는 뚝뚝 떨어지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을 먹고 봉고차를 타자 첫날 우리에게 69 호수 트래킹을 제안했던 수염 가이드가 앉아있었다.


저 멀리 두 개의 호수가 에메랄드 보석처럼 빛나는 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데 예리가 봉고차 안에 앉아있는 크리스티나를 번쩍 들어 데리고 왔다. 그 녀석! 이럴 때는 미워할 수 없네. 난 내친김에 아돌프와도 사진을 찍었다. 그는 매일마다 모든 여행자들의 텐트를 쳐주고 갖은 잡일을 도맡아 했는데 다른 일정 때문에 하산을 한다고 했다. 사진을 찍고 그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악수를 하는데 알 수 없는 거친 감정이 가슴팍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텐트를 치고 접었을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 높고 험한 안데스 산맥을 오르락내리락했을까? 그는 나보다 훨씬 젊었지만 그의 손은 평생 농사일을 한 농부처럼 억세고 투박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과 그의 손은 수많은 책 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아돌프, 그동안 고마웠고 건강하길!

봉고차가 떠나고 다시 트래킹이 시작됐다. 새벽부터 일찍 걸어서 그런가? 아니면 잠을 덜 자서? 호수 옆에 앉아 종이 같은 빵조각을 먼지와 함께 천천히 씹고 있는데 앞에 보이는 언덕이 마지막이라고 요리사이자 산악인인 프렌시스코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래. 다 왔다. 조금만 힘내자! 조금만! 그러나 얼마 후 몸은 긴급상황이라고 여기저기서 빨간불을 켜댔다.


뇌: 지금 상황이 어떤가?

심장: 고도가 3천 미터를 훌쩍 넘고 체력이 바닥이 나서 그런지 버티기 힘들 지경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심장이 터지기 일보직전입니다. 조속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위: 벌써 1시간째 아무런 음식물 섭취 없이 걷고 있습니다. 당이 필요합니다. 당이!

눈: 시야가 흐려지고 있으며 몸 자체가 비틀거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상황이 시급합니다.

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군. 지금부터 비상체제에 돌입한다. 삼장은 좀 더 버텨보고 위는 지방, 근육에서라도 당을 어떻게든 끌어오도록 하고 말초신경은 최대한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피로도를 잠깐 잊게 하도록 한다. 또한 각종 근육들은, 특히 허벅지 근육들은 피로도를 시시각각 보고 하도록 이상!


앞으로 발을 디딜 때마다 헉! 헉! 하는 호흡소리가 귀에 들렸고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이러다가 정말 심장이 입 밖으로 왈칵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약한 소리 하지 말자. 언덕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피하지 말고 앞으로 걸어가자. 앞으로!


이게 바로 69 호수구나!

파워에이드 보다 진한 색의 호수 빛과 그 위에 보이는 웅장한 설산들이 사정없이 눈을 찔렀다. 몇 번의 와아! 소리를 혼자 내뱉으며 말없이 돌 위에 앉아 호수를 지긋히 바라봤다. 도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말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이 목구멍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자연은 인간을 침묵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등산객 일행이 모두 정상에 도착한 후 우린 프렌시스코가 나워주는 볶음밥을 먹었다. 6시간 동안 트래킹을 한 후, 얼음물 같은 69 호수에 발을 담그며 먹는 볶음밥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밥풀 하나도 남김없이!

하산길은 힘들지 않았지만 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변이 어둑어둑 해질 무렵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행들은 해냈다! 와 무사히 트래킹을 마쳐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머금고 차에 올랐다. 차는 금세 정적으로 뒤덮였고 지친 눈들만 깜박거렸다. 2시간 반 만에 와라즈 시내에 도착한 우린 그간 함께 트래킹 했던 일행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작별을 했고 크리스티나에게는 건강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호스텔에 들어가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쏴아~하고 나오면서 몸을 적시는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값 비싼 음식을 먹은 것도, 호화로운 호텔에서도 잔 것도 아닌 그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데 행복감이 혈관을 타고 빠르게 온 몸에 퍼져나갔다. 행복이 목구멍까지 뜨겁게 차 올라와서 절제하지 않으면, 억제하지 않으면 난 지금 행복해!라고 소리치며 낄낄거릴 것만 같았다.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눕자 4박 5일간 트래킹 영상이 머리 속에서 휙휙 지나갔다. 안데스 산맥 정말 대단했어. 호수들, 바위들, 설경들, 별들, 물소리, 바람소리... 그러다 툭 튀어나온 감사!라는 단어. 여전히 살아 있어서, 내 옆에 아내가 있어서, 뜨거운 샤워 한번으로 행복감에 빠질 수 있는 기회까지...그러고 보면, 난 행복한 사람이다.